[밀물썰물] 1592년 부산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430년 전인 1592년. 부산의 겨울과 봄은 비교적 평온했다. 하지만 무더위가 막 시작된 음력 4월 13일(양력 기준으로 5월 24일)부터 부산은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전쟁의 큰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날 오후 5시께 왜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소속 1만 8700명의 병력은 700여 척의 배를 타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7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왜군은 그날 부산 동구 좌천동 정공단 앞쪽 해변에 상륙해 야영을 하며 해가 밝기를 기다렸다. 왜군의 야영지 맞은편엔 부산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날인 음력 4월 14일,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고 부산진성 첨사 정발 장군 등은 결사항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어 동래성으로 향한 왜군의 주력부대는 오늘날 부산시장에 해당하는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해 장졸과 양민들을 도륙했다. 부산 사하구 다대포 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윤흥신 다대첨사 등 1200여 명도 목숨을 잃는다. 부산을 시작으로 조선의 강산은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하지만 그해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5일) 이순신 장군이 부산 자갈치시장 인근 남항 앞바다인 부산포에서 왜선 128척을 격침시키면서 전쟁의 양상을 뒤바꾼다. 부산포해전이라고 불리는 부산대첩이다.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해전이라는 점에서 한산대첩과 함께 큰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해전을 앞두고 가덕도에 작전지휘부를 설치했다. 가덕도를 부산의 왜군을 공격할 발진 기지이자 교두보로 삼은 것이다. 당시 가덕도에는 천성진성과 가덕진성이라는 요새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해전을 앞두고 이 성에도 머물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430주년을 맞아 지난달 25일 부산 충렬사에서는 임진왜란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제향 의식이 거행됐다. 지난달 20일 부산박물관은 천성진성 발굴 조사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이번 발굴에서 중요 시설물을 확인한 데 이어 다수 유물을 수습했다. 부산은 임진왜란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 격전지이자 전쟁 흐름을 바꾼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 발굴 노력은 극히 미진하다. 그 서럽고 고귀했던 수많은 희생에 대한 특별한 애도도 미흡하다. 천성진성을 사적으로 지정해 ‘부산의 이순신 유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물론 더 늦기 전에 임진왜란 당시 부산 역사를 세밀하게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영철 문화부장 cyc@busan.com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