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 칼럼] 이제는 지경학적 실리 외교 펼칠 때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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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4개월 가까이 됐다. 장기화하는 이 전쟁을 계기로 주목받는 근대 인물이 있다. 영국 지리학자 해퍼드 존 매킨더(1861~1947)다. 그는 지리적 위치가 국제 정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지정학(地政學·Geopolitics)을 개척했다. 유라시아(유럽·아시아) 개념을 창시하기도 했다. 매킨더의 ‘심장지대(Heartland) 이론’이 우크라이나전쟁을 유발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그가 현세로 불려 나온 것이다.

매킨더는 저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에서 심장지대론을 펼쳤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지(동유럽)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 패권을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동유럽, 즉 심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진하려는 서유럽과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간 오랜 갈등 끝에 발발한 게 우크라이나전쟁이라고 판단한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 소재한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풍부한 광물자원, 세계 3대 곡창지대,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향하는 대규모 가스관 밀집 등으로 엄청난 가치를 보유한 국가다. 이 나라가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나 EU(유럽연합)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는 시도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패권적인 러시아가 일으킨 이번 전쟁은 매킨더의 지정학적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는 건 당연할 테다.


우크라이나, 유럽의 격전지로 전락

한반도 역시 장기간 외세에 시달려

한·미·일, 북·중·러 신냉전 구도 형성

평화 구축 위해 슬기로운 대처 필요

‘경제가 곧 안보’ 인식 확산하는 추세

동맹 강화 속 다층적 외교 전개해야


매킨더의 지정학 관점은 한반도에도 적용된다. 예부터 강대한 대륙 세력과 만만치 않은 해양 세력의 간섭에 시달리고 침략도 자주 당했다. 반도 국가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 탓이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다’는 ‘새우 콤플렉스’에 늘 짓눌려 지냈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4개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아슬아슬하게 이어 오는 줄타기 외교가 엄연한 현실이어서다. 열악한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도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장점으로 활용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 내 천만다행이다. 1960년대부터 부산항을 기점으로 오대양을 누비며 무역 강국과 선진국으로 거듭나지 않았는가.

이런 가운데 남북 관계는 미·일·중·러 4강에 휘둘리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 위협으로 남북 관계가 악화해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는 실정이다. 더욱이 북핵을 반대하는 한·미·일과 북·중·러 진영 간 대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수년 전 시작된 미·중 양국의 세계 패권 경쟁이 촉발한 신냉전 구도의 한복판에 한반도가 자리 잡은 셈이다. 자칫 한반도가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격전장이 된 우크라이나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한반도에 닥친 신냉전 시대를 잘 헤쳐 나가기 위해 지정학을 넘어선 지경학(地經學·Geoeconomics)적 시각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지경학은 지리적 특성이나 인구가 경제, 특히 대외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살피는 새로운 연구 분야다.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해 유라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물류·경제 중심지로 성장한다는 전략은 지경학적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이에 힘입어 동북아에 남북을 고리로 한 경제공동체가 형성돼 세계 최대의 신성장 지대가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 싶다. 북한의 무력시위에 철저히 대응하되 대화의 노력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지난달 22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새롭게 출범시킨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한국이 동참하게 됐다. 또 나토가 오는 29일 스페인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에 우리나라를 글로벌 파트너 국가로 초청해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안보·외교 연대를 강화하고, 세계 중추국으로서 위상을 높이며 역할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반면 남북 평화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중·러의 반감을 사고 경제 제재가 이어질 우려가 있다.

신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안보 태세와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지경학적 외교 자세가 요구된다. 지난달 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반도체 강국인 한국을 일본보다 먼저 방문해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서둘러 찾은 까닭을 참고할 만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차질에서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가 미·중 기술 패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안보·경제’가 한·미 정상회담의 최고 의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안보’란 인식의 확산으로 지경학적 접근이 절실해졌다. 윤석열 정부가 다층적 실용 외교로 대처할 때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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