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윤석열 대통령의 위기십결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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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문재인 정부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연합뉴스

“남 목숨 소중한 줄 아는 자라야만 내 목숨 소중한 것도 알 수 있는 법, 그런 마음으로 어찌 이기기를 바라고, 국수를 도모하리!” 명적사 조실 백산노장은 조선의 국수(최고의 바둑 고수)를 꿈꾸는 양반집 어린 도령 김석규에게 “돌을 거두라”고 일갈한다. 노장은 승부에 집착하는 석규에게 “나를 살리고 남을 죽이는 판가리(판가름)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친다. 바둑을 소재로 조선 말기 정치와 사회 현상을 세밀하게 파헤친 김성동 작가의 소설 〈국수〉의 한 장면이다.

중국 후한 시절 역사가 반고는 “천지의 조화도, 제왕의 정치도, 패군의 권세도, 전역의 방도도 모두 바둑의 이치에 감추어져 있다”라고 썼을 정도로 동양에서 바둑이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바둑에서 얻은 지혜를 삶에 적용하면서 다양한 ‘바둑의 비결’이 전해 온다. 대표적인 것이 당나라 현종 시대 지어졌다는 바둑 십계명 ‘위기십결’이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예측할 수 없는 수와 다양성을 갖고 있다. 착수된 돌들도 상황에 따라 역할이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바둑은 살아 움직이는 정치판과 유사한 면이 많다. 정치는 바둑돌처럼 하나하나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상대편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윤석열 새 정부의 인사와 전 정권 수사 급물살, 국회 공전 사태 등을 관전하면서 고비마다 위기십결이 떠오른다.


수천 년 얻은 지혜 동양 사회에 영향

바둑은 살아 움직이는 정치판과 비슷

억지로 이기려는 욕심은 실수만 유발

다르고 불편하지만, 공존도 생존 방법

거대 야당과 싸움보다는 협치 필요

상대 공격보다 자신의 내로남불 살펴야


첫 번째가 바둑계 전설 이창호 9단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 ‘부득탐승’이다. ‘이기려는 목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바둑을 그르치기 쉽다’는 말이다. 특수통 검사로 승승장구한 윤 대통령은 이기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억지로 이기려는 욕심은 판세를 읽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위기십결에서는 ‘신중하고, 경솔하지 마라’(신물경속)고 경고한다. 경솔하고, 빠르면 수읽기를 덜 하게 되고, 착각과 실수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산업부 블랙리스트’ ‘여가부 대선 공약 개발’ 등 전 정권 수사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정치 보복”이란 비판에 “중대 범죄 수사는 국민 여망”이라고 대립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의 억울함은 당연히 풀어 줘야겠지만, ‘범죄와의 전쟁’ 같은 마음으로 이기려는 욕심과 서두름은 실수를 수반한다. 완생(집이나 돌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을 놔두고 상대방의 미생(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을 계속 추궁하면 완생마저 위태로워진다. 불편하지만, 가끔은 공존이 방법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높은 정권교체 열망에도 불구하고,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회에는 172석의 거대 야당이 포진해 있다. 위기십결에서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자중하고 자신을 보강한다’(피강자보)와 ‘세력이 빈약한 경우, 분란 대신 타협이 우선’(세고취화)이란 정석을 제시한다. 지지 기반이 약함에도 자기 능력만 믿고 상대의 집에 마구잡이로 뛰어들거나, 내 돌의 약점이 많은 곳에서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민주당이 반대하면 민생에 가장 시급한 유류세 추가 인하를 위한 법률 제정조차 할 수 없다. “의회주의를 늘 존중하겠다”라는 윤 대통령의 협치 약속이 꼭 지켜져야 할 현실적인 이유다. ‘강대강’ 대립에서 벗어나 야당과 협상으로 하나하나 푸는 것이 기리(수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이치)에 맞다. 혹시나,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면 상대방이 돌을 던질 것이라는 불계패의 기대는 접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게 가해졌던 법치주의 잣대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는 ‘공피고아’(상대를 공격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점을 살펴라)도 중요하다. 만취 운전 경력이 드러난 장관 후보자, 검찰공화국으로까지 불리는 고위직 인사에서 문재인 정권의 대명사였던 ‘내로남불’이 지금은 없는지 냉철하게 따져 봐야 한다. 위선을 반복하면 패망하기 십상이다. 바둑에서는 유독 ‘버려라’는 말이 많다. ‘봉위수기’(위기에 처하면 버리라)가 대표적이다. 버릴 줄 모르면 결코 높은 수준의 바둑,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소설 〈국수〉에서 백산노장은 “삼라만상이 다 그렇듯 (바둑)돌 또한 살아 있는 목숨이니라. 이러한 이치를 모른 채 돌을 잡은 자… 다만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만 이끌려 있으므로… 돌을 죽일 뿐만 아니라 나를 죽이는 일이다”라고 설파한다. 윤석열 새 정부가 수천 년 쌓아 온 위기십결의 교훈을 경청하라고 훈수하고 싶다. 바둑 고수들은 한 수 한 수 목숨을 걸고 두다가도, 한번 지면 다음날 다시 두면 된다. 하지만, 5년 뒤 윤 대통령에게는 복기할 겨를도, 다시 새판을 둘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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