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엄마가 생각나는 고마운 바다야”… 청사포 해녀 정영자 이야기 #7-3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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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 정영자(68) 해녀 이야기>


엄마는 내가 해녀가 되지 않길 바랐다. 딸이 고생하는 게 좋을 엄마가 어딨겠나. 그런데 물질하는 집안에 시집가면서 해녀가 됐다. 엄마 가슴에 못을 박은 셈이다.

청사포 앞바다를 40년 넘게 누볐다. 요즘 전복을 많이 따면 엄마 생각이 난다. 당시 엄마는 우뭇가사리 정도만 뜯을 수 있는 해녀였다. 실력이 좋은 상군 해녀에겐 유통업자가 죽을 끓여 대접하기도 한 시절. 우리 집은 그런 거 한 번 못 얻어먹었다.

난 ‘물건(해산물)’을 많이 건지는 상군 해녀가 됐다. 엄마가 살아있다면 “아이고 우리 딸이 이만큼 잘할 때가 있었나”라고 말하지 않을까. 물질하다가 엄마 생각이 나면 가끔 물 위에 올라와 울기도 한다.

정영자 해녀(오른쪽)가 청사포 앞바다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정영자 해녀(오른쪽)가 청사포 앞바다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다이버가 왔다는 헛소문

내 고향은 부산 기장군 공수마을. 어릴 때 바다에서 자주 놀았지만, 물질은 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우리 동네에 온 남편을 만났다. ‘머구리(잠수부)’였던 그와 눈이 맞았다.

스물셋에 청사포로 시집갔다. 시아버지, 시숙, 남편까지 머구리인 집안이었다. 자연스레 나도 물질을 시작하게 됐다. 엄마 가슴에 못이 박혔을 거다. 당시 물질 안 하는 집에 시집 보내는 게 엄마들 소원이었다.

처음엔 ‘다이버 스타일’이 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바닷가 출신인 내가 물질을 잘할 거라 생각하고 텃세도 부렸다. 그런데 정작 난 물질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청사포 해녀들을 따라다니며 물질을 배웠다. 전복을 발견해도 못 따는 수준이었다. 주변에 있는 해녀에게 “저기 아가씨요, 여기 전복 좀 따주세요”라 부탁할 정도였다. 해녀들에게 ‘언니’ ‘형님’ 하면서 서럽게 물질을 배웠다.

말똥성게도 내가 300g 잡으면 다른 해녀들은 1kg씩 갖고 나왔다. 5년 정도 지나서야 물건을 많이 잡게 됐다. 내가 청사포 막내 해녀인데 그때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졌다.

옛날에 엄마가 해준 말을 되새긴 덕인 듯하다. 엄마는 물질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이 쉴 때 한 번이라도 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각오로 바다에 가다 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잠수하게 됐다. 지금도 다른 해녀가 두 번 내려갈 때 난 세 번은 들어간다.

정영자 해녀가 청사포마켓에서 옛 바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정영자 해녀가 청사포마켓에서 옛 바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바위틈에 손이 낀 순간

청사포 해녀들은 모두 토박이거나 부산 일대에서 시집온 사람들이다. 다른 지역에 시집갔다가 돌아온 해녀도 있다. 남들에겐 힘들어 보여도 우린 물질이 다른 일보다 편하고 수월하다.

물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전복을 찾으려면 보통 바위 밑에 손을 넣는다. 전복 껍데기는 다른 조개류와 달리 미끄러운 느낌이 있다. 큰 전복은 그렇게 찾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바위틈이 좁은 경우가 많다는 거다. 손을 넣을 때는 쏙 들어갔는데 정작 빠지지 않을 때가 있다. 전복을 발견해 기분이 좋다가도 순간 엄청나게 놀라게 된다. 손을 막 흔들면서 안 빠지면 어쩌나 싶어 간이 벌떡벌떡한다.

하늘이 노래진 적도 있다. 보통 전복은 단번에 따기가 어렵다. 끝까지 따려다 보면 숨이 껄떡껄떡한다. 겨우 물 위에 올라와도 엄청나게 힘들다. 간이 벌렁벌렁해서 한참 쉬어야 한다.

해초가 물질을 방해할 때도 있다. 봄에 피어서 여름쯤 없어지는 모자반이 대표적이다. 청사포에는 먹지도 못하는 개모자반이 자란다.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 올라올 때 머리에 걸린다. 헤엄칠 때 앞을 가로막아 해치고 나아가야 할 때도 많다.

정영자 해녀가 청사포 바다 밑에서 해산물을 수확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정영자 해녀가 청사포 바다 밑에서 해산물을 수확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바닷속에 사람이 있다고?”

바다에서 재밌는 추억도 있었다. 다릿돌 섬 주변에 갔을 때다. 해녀 한 명이 수면 위로 올라와 “사람 시체 같은 게 있다”고 했다. 얼마나 놀랐겠나. 머리랑 어깨 형상이 보였다고 했다.

알고 보니 마네킹이었다. 확인하러 물속에 들어간 해녀가 ‘옷을 걸어놓고 팔 때 쓰는 그것’이라 말했다. 단체로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마네킹인 건 확인했는데 무서워서 치우진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물속에 마네킹을 두고 육지로 돌아와 의논했다. 결국 다음 날 다 같이 바다로 나가 마네킹을 주워 오기로 했다.

우리는 다릿돌로 돌아갔고, 한꺼번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누구라도 발견하는 사람이 마네킹을 줍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덜 무서울 거라 여겼다.

나는 물속으로 내려가다 중간에 다시 올라왔다. 눈앞에 마네킹이 나타나면 감당이 안 될 듯했다. 무서울 거 같았다. 그사이 바로 옆에 있던 친구는 내가 올라온 것도 모른 채 바닥까지 내려갔다.

하필 마네킹은 그 친구 눈앞에 나타났다. 용기를 내 혼자 마네킹을 들고 온 친구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왜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지금 저세상에 가고 없다. 죽은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 되게 친했던 덕인지 죽고 나서 꿈에도 많이 보였다. 그 친구를 위해 술을 사서 부어주기도 했다. 그랬더니 요즘은 꿈에 아주 예쁜 옷을 입고 나타나더라.

청사포 해안도로 주차장에 놓인 ‘해녀 출입구’ 그림.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청사포 해안도로 주차장에 놓인 ‘해녀 출입구’ 그림.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며느리가 그려준 ‘해녀 출입구’

청사포 해안도로 주차장에는 해녀들이 바다를 오가는 통로가 있다. 그곳엔 귀여운 그림을 붙인 의자가 놓여있다. 해녀 캐릭터 그림과 함께 ‘해녀 출입구’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우리 며느리가 만든 거다. 지금은 문을 닫았는데 의자가 놓인 곳 건너편이 우리가 장사하던 집이었다.

주차장 통로 앞에서 해녀들은 우리 가게를 자주 쳐다봤다. 물건이 무거워 옮기기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고령의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면 아무래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아들과 며느리가 가게에서 나와 물건을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출입구에 차량이 주차된 날은 아무래도 물건 옮기기가 불편했다. 사이드미러나 문에 부딪힐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통로 입구에 의자를 뒀다. 그래도 주차할 공간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의자를 치우고 차를 대놓기도 했다. 물질을 마치고 지친 해녀들이 육지로 돌아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며느리가 해녀 그림을 그리고, ‘해녀 출입구’ 글자를 적은 종이를 의자에 붙였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그쪽에 차를 대지 않았다. 해녀 그림과 출입구라는 글자를 보고 배려해준 듯하다.

정영자 해녀가 옛날 이야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정영자 해녀가 옛날 이야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고마운 청사포 바다

물질은 더 안 해도 여한은 없다. 아들도 친구들한테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밥 먹고 살 만한데 어머니 계속 힘든 일 하게 한다고.

그래도 물질이 몸에 배었는데 어떻게 그만두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지. 손주들한테 요구르트도 사주고 이것저것 해줄 생각하면 할 만하다. 청사포 해녀들은 기를 쓰고 돈을 벌려곤 하지 않아서 단체로 쉬는 경우도 많다.

나이가 든 청사포 해녀들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여든 넘은 해녀도 마을 경로당에 가질 않는다. 우리 곁에 남은 그들에게 “졸업하고 경로당 가라”고 농담도 하는데,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니 떠나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와 함께 한 바다엔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마음속으로 한 번씩 이렇게 말한다. 물건을 많이 했을 때는 “용왕님 고맙습니다”라 한다. 적게 했을 때는 “용왕님 오늘 전복은 왜 안 주시냐”고 할 때도 있지만, 바다는 삶의 터전인 데다 자식들 키우게 해준 고마운 존재다. 바다는 엄마 품속 같기도 하다.


※정영자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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