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그깟 탈북자 하나라도!"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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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논설위원

26년 전 페스카마호 취재 기억 호출
베테랑 수사관들 치밀한 현장 검증
‘북한 선원 살인’ 사건 의문 증폭돼
단 2명이 15~16명 살해 가능할까
‘카더라’ 아닌, 실체적 진실 밝히고
정치 공방 떠나 가이드라인 삼아야

1단짜리 기사가 시작이었다. 해양수산부를 출입하던 〈부산일보〉 서울지사 기자의 기사 제목은 ‘한국 선원 7명 승선 페스카마15호 통신 두절’(1996년 8월 19일 게재)이었다. 부산해양경찰서를 출입하던 당시 4년 차 사건기자는 “뭔가 있다”라는 특종 욕심에 타사 기자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해경 형사계를 들락거렸다. 형사계 사무실에서 라면을 함께 먹으며 “우리가 남이가”라며 의리를 과시했던 고참 형사 3명이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형사계장을 닦달했지만, “여름휴가”라는 미심쩍은 답만 돌아왔다.


익숙한 해경 전화번호로 날라 온 삐삐(무선 호출기) 한방에 부산항 8부두 옆 해경 형사과로 뛰어갔다. “온두라스 국적 원양참치연승어선 페스카마15호(295t)에서 중국 교포 선원 6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인 3명, 중국인 1명 등 선원 11명을 흉기로 살해한 뒤 바다에 버렸고, 현재 부산항으로 예인하고 있다.” 긴장한 탓인지, 해양경찰서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한민국 최초로 발생한 해상살인강도 사건의 서막이었다.

외교 분쟁을 우려한 일본 해상보안청은 한국 해경과 협의 끝에 자국 영해로 표류해 온 페스카마호를 공해로 밀어냈다. 수사관 등 체포조 30여 명을 태우고 급파된 3001구난함(3000t)이 용의자인 중국 교포 선원 6명과 페스카마호를 확보했다. 배가 부산해경 부두에 닿자 해상 범죄 베테랑 수사관들과 부산지검 검사 3명이 투입돼 선상 반란을 주도한 전재천 씨 등과 피해자 신문을 하고, 현장 검증보고서를 시간·장소별로 세밀하게 작성했다.

경찰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보름을 버틴 끝에 현장 검증보고서를 살짝 넘겨받아 ‘남태평양의 선상 반란’ 기사를 썼던 26년 전 기억이 갑자기 호출되고 있다. 2019년 동해상에서 나포된 ‘북한 오징어잡이어선 선원 살인 및 강제 북송’ 사건이 연일 정국을 강타하면서다. 두 사건이 판박이인 듯하지만, 페스카마호 취재기자의 눈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첫 번째가 아무리 자료를 살펴봐도 살해된 피해자가 15명인지, 16명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범죄 동기와 피해자 인적 사항 등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 육하원칙에 따른 사실관계가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수사 경찰과 검사에 의한 현장 검증과 대질 신문도 없었다. ‘흉악범’이라는 거친 주장만 있을 뿐,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려던 적법한 노력은 애초부터 없었다.

두 번째가 페스카마호와는 달리 모두가 훤히 보이는 17t 짜리 소형 어선에서 선원 2명이 경험 많은 선장 등 동료 선원 15~16명을 분산·유인해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합리적 의심이다. 페스카마호는 선원 20여 명이 거친 남태평양에서 1년 남짓 살 수 있는 295톤급 참치잡이 원양어선이다. 조타실, 기관실, 침실, 선장실, 음료수·식량·어구 창고, 냉동창고 등이 미로처럼 나뉘어 6명이 다수인 11명의 선원을 개별적으로 유인해 조직적으로 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전 정권의 각료들이 “오빠 못 믿나”를 외치며 한국군의 SI(특별취급정보)와 합동심문 결과를 흔들고 있다. 합동심문은 위장귀순자나 위장간첩을 적발하기 위한 수준이지, 범죄 수사 전문가가 참여해 현장검증을 하는 제대로 된 수사는 아니다. 결국 15~16명이 살해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와 수사 결과조차 갖지 못한 채, 북한 선원을 강제 송환했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북한 어선과 용의자들에 대한 공개수사와 현장 검증, 재판과 자유로운 언론 취재가 진행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면, ‘카더라’ 첩보에 의존한 정치 공방이 생길 여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최근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가 속한 법무팀이 강도상해 혐의로 기소된 탈북자 여성에 대한 공익변호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자 “영업에 지장을 준다”며 임원급 변호사가 불만을 토로한다. 우영우의 멘토인 정명석 변호사는 “그래도 그깟 탈북자 하나라고 생각하진 말자”라면서 적극적으로 변호해 집행유예란 최선의 판결을 받아낸다.

윤석열 정부도 “그래도 그깟 탈북자 하나라고 생각하진 말자”는 자세로 ‘해상 살인 및 강제 북송’ 사건의 실체적 진실만 제대로 밝히고, 문제가 있으면 관련자를 징계하면 그만이다. 혹시나 지지율 회복이란 당장의 욕심에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을 정치 쟁점화한다면 ‘전 정권 보복 수사’라는 멍에만 쓰고, 대한민국을 끝 모를 분열과 정치 투쟁에 빠뜨리게 된다. 사실은 명명백백하게 밝히되, 정쟁 거리로 비화시키지 않는 자제의 지혜도 필요하다. 그래야 잇따를 제2, 제3의 탈북 사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국가가 진정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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