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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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법대로 하자’는 싸우자는 의미
‘법과 원칙’ 강조 지나쳐 거슬려
하향적 지배 수단 인식이 잘못
권력자 준법 강조 의미 깨달아야
“약자에게만 엄격” 지적 명심
하반기엔 달라진 모습 기대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7말8초’는 연중 가장 붐비는 여름 휴가철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다음 주에 휴가를 간다고 한다. 공무원들 모두 휴가 가라는 의미라는데 이 같은 솔선수범은 잘하는 일이다. 쉬면서 하반기 국정운영 방향을 새롭게 구상하고, 말 많고 탈 많았던 도어스테핑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독서광이었던 전임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휴가 기간 읽었던 독서 리스트가 나돌았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는 윤 대통령이라 혹시 휴가철에 다녀간 대통령의 맛집 리스트가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윤 대통령은 정치 입문 이후 불철주야로 달려왔기에 쉬면서 힘 좀 빼면 좋겠다는 의미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완고한 모습만 보여 주면 서로 좋을 게 없다.


좋은 말도 세 번이면 질린다고 했다. 대통령부터 총리, 장관, 여당 대표 직무대행까지 툭하면 ‘법과 원칙’ 그게 아니면 ‘법치주의(법치국가)’를 입에 올리니 거슬린다. 윤 대통령은 “선진국, 특히 미국은 정부 소속 법조인들이 정·관계에 아주 폭넓게 진출하고 있다. 그게 법치국가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미국보다 더한 법치국가다. 전임 대통령부터 현직 대통령까지, 심지어 여야의 차기 대통령 유력 후보들까지 모두 법조인 출신인 나라다. 21대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은 총 46명으로 전체의 15%를 넘는다. 20대 국회에는 49명으로 지금보다 많았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 ‘쪽수’로 따지면 이만한 법치국가가 세상에 없다.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유혈 사태 없이 마무리되어 천만다행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은 “법과 원칙을 향한 윤석열 정부의 단호한 태도가 극한투쟁에 제동을 걸었다”고 평가했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대통령이 노사관계에서 법치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면서 공권력 투입 가능성을 시사했을 때는 정말 큰일 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업 불황으로 지난 5년간 30%의 임금 삭감을 감수했다. 조선업이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임금을 회복시켜 달라는 요구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통해 파업이 장기화되는 것을 미연에 막았어야 했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행정안전부 산하 경찰국 신설 논란도 그렇다. ‘검수완박’ 입법 이후 경찰 권력 비대화가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국회 통과가 필요한 법 개정을 우회해 시행령 개정으로 처리한다면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원칙에 부합하는 일인가.

여야 간 법에 대한 해석 차이가 커서 누구 말이 맞는지 늘 헷갈린다. 법에 대한 정의(定義)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소개한다. 법(法)은 물 수(水), 거할 거(去)를 합친 글자로 물이 흘러가는 길을 말한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늘 낮은 곳을 향한다. 그리고 더 이상 아래로 흐를 곳이 없으면 수평을 이루는데 이것이 평등이다. 물이 흐르듯 힘없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소외받는 사람을 위해 법이 존재해야 하고,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른 물이 수평을 이루듯 모든 사람이 두루 평등하게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진정한 법치국가다. 도사 같은 행색에 한때 공중 부양(?)으로 명성을 떨친 전직 정치인이자 현직 농부의 이야기다.

휴가를 앞둔 대통령에게 지난 4월에 타계한 법조계의 거목 한승헌 변호사의 책을 권해 드리고 싶다. 법치주의 관련해서도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와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두 권이 있다. 이 책들에서 한 변호사는 “한국의 집권자는 법치주의를 하향적 지배 수단으로 잘못 알고 있다. 법치주의가 하향적 지배가 아닌 상향적 권력 견제 장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집권자는 국민에 대한 준법 훈시가 법치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법치주의 또는 법과 원칙을 내세워 묻지 마 밀어붙이기 등 독재를 꾀하는 지도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일갈한다. 또 여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줄여서 ‘민변’, 즉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라는 간판 글씨를 그가 직접 썼다고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권력의 단맛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법대로 하자’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다. ‘옳고 그름을 법으로 판단하자’는 말이지만 ‘싸우자’라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도 25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는 오직 약자에게만 엄격하다”라고 했다. 대통령과 당정은 법치주의라는 명분으로 국민을 윽박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모든 걸 법대로 할 것 같으면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나. 대체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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