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것들] ‘열어요’ ‘쉬어요’보다 ‘Open’ ‘Day off’가 익숙한 간판…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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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주니어보드 '요즘것들'

카페·맛집엔 외국어 간판 일색
미숫가루도 ‘M.S.G.R’로 표기
큰 한글로 쓴 ‘산복빨래방’ 간판
SNS “알기 쉽게 적어 더 멋져”

산복빨래방 한글 간판을 칭찬하는 네티즌들의 댓글. 트위터 캡처 산복빨래방 한글 간판을 칭찬하는 네티즌들의 댓글. 트위터 캡처

저는 요즘 아침마다 빨래방으로 출근합니다. 아, 빨래방을 창업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아닙니다. 〈부산일보〉에서 4년째 일하고 있는 기자니까요. 회삿돈 2000만 원을 들여 차린 이곳 ‘산복빨래방‘에서 주민들에게 돈 대신 이야기를 받고 무료로 빨래해 드리고 있습니다.


최근 산복빨래방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주목받은 이유가 특이했는데요. 바로 간판 때문입니다. 빨래방 앞에는 작은 입간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이곳 주민을 위해 큼직한 한글로 빨래방 영업시간과 요일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Open’ ‘Close’ ‘Day off’ 대신 ‘열어요’ ‘닫아요’ ‘쉬어요’라고 썼습니다. 이를 본 온라인 반응을 요약하자면 ‘간판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로, 큰 글씨로, 알기 쉽게 적은 게 예쁘다’ ‘외국어로 뒤덮은 간판보다 훨씬 개성 있다’ 등입니다.

고마운 마음도 잠시, ‘왜 갑자기 간판에 대한 반응이 뜨거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답은 금세 나왔습니다. 소위 인기 카페나 맛집을 갈 때면 간판이나 안내문이 영어 일색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CAFE(카페)’ ‘GYM(체육관)’ 같이 비교적 쉬운 영어를 간판에 써 놓은 곳은 양반입니다. 메뉴판 전체가 영어 필기체로만 쓰여 있는 곳도 적잖게 봤습니다. 요새는 영어도 흔하니, 이탈리아어나 불어로만 적기도 한다네요. 수도권 어느 카페에서는 메뉴판에 미숫가루를 굳이 ‘M.S.G.R’라고 썼다가 온라인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간판이나 메뉴 모두 ‘안내’나 ‘정보 전달‘이 목적인데도 외국어가 많아지는 이유가 뭘까요. 아무래도 멋 때문일 겁니다. 우리 뇌는 외국어를 문자보단 그림으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쉽게 디자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게가 자기 얼굴인 간판과 메뉴를 예쁘게 만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문제는 본래 목적을 잃고 지나치게 디자인에만 의존한 나머지, 어르신 등 특정 계층에게 장벽을 높인다는 점입니다. 현행 옥외광고물법에서는 5㎡ 이상의 간판을 외국 문자로 표시할 때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함께 적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를 감독하거나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는 실정입니다.

결국 법보다는 모두의 인식이 중요하겠죠. 흘려 쓴 외국어보다도 또박또박 쓰인 한글이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한글로만 쓰인 산복빨래방 간판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호평을 받은 건 바람직한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종로구가 멋진 한글 간판을 지원하는 것처럼 제도적 도움도 뒷받침되면 좋겠습니다. 특정 계층을 소외시키기보다 모두를 배려하는 간판이 더 ‘힙(Hip)하다’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참, 저도 이참에 ‘힙하다’는 말보다는 ‘멋지다’ ‘감각 있다’고 쓰겠습니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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