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헤어지기 전에, 은행나무 아래서 추억 만들기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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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의병장 생가 앞 천연기념물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늘어선 ‘거창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경남 거창군 거창읍 학리 의동마을의 은행나무길이 황금빛 터널을 이루고 있다. 경남 거창군 거창읍 학리 의동마을의 은행나무길이 황금빛 터널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 점점 짧아진다. ‘이러다 곧 겨울 날씨가 되겠지’ 싶은 생각에 가을날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2022년의 가을을 떠올릴 추억으로 ‘노란 은행나무’를 택했다. 가지마다 가득 노란 잎 달린 풍경도 좋고, 낙엽 비로 흩날리는 것, 노란 은행잎 카펫을 밟는 것도 좋다. 은행나무의 가을 선물을 받으러 경남의 곳곳을 달렸다.


■곽재우 의병장 생가 앞에 고고히 선 은행나무

은행나무가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나무는 아니다. 공기를 정화하는 효과가 크고 병해충에 강해 도심 가로수로 많이 심기 때문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은행 열매의 악취 문제로 뉴스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악취의 고통을 잊게 할 만큼 노란 은행잎이 주는 가을 정취는 깊다.

은행나무를 찾아 달려간 곳은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나무 한 그루 보러 길을 나설 만한가 싶었지만,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의 ‘우영우 팽나무’에서 느꼈듯이 한 그루의 나무가 거대한 산의 기세를 뿜기도 한다. 산들이 여름 볕 아래 초록 옷을 입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울긋불긋 가을 옷을 차려입었다. 가을 추억을 쌓으러 가는 길에 이미 가을 낭만에 빠졌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는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 앞에 고고히 서 있다. 나무의 우람한 덩치는 멀리서부터 눈길을 끈다. ‘우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도심의 가로수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주변 공원에 자라는 키 작은 은행나무는 이미 샛노랗게 가을을 태우고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600살 은행나무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2m 정도의 높이에서 줄기가 사방으로 갈라져 있는 나무는 웅장함 그 자체. 나무 높이 21m, 가슴 높이 줄기 둘레 10.3m, 뿌리목 줄기 둘레 11.1m. 이 은행나무를 설명하는 수치에서 크기와 세월이 느껴진다.


천연기념물인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인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은행나무.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 뒤편에는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 뒤편에는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만큼 나무를 둘러싸고 넓게 울타리가 쳐져 있다. 나무를 바라보며 천천히 한 바퀴 걸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나무 모양이 달라 보인다. 나무 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은 2005년에 복원한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이다. 곽재우 장군은 1552년 8월 28일 이곳 세간마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재산이 ‘수만금에 달했다’고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형태로 사랑채, 안채, 대곳간, 소곳간,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당 등 7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에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꽉 차게 들어온다.

세간마을 어귀에는 ‘현고수(懸鼓樹)’라 불리는 느티나무도 있다. 이 느티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당시 41세 선비였던 곽재우가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했다고 전한다.

생가 옆은 ‘곽재우장군 문화공원’로 꾸며졌다. 백마를 타고 홍의를 입은 곽재우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다. 널따란 잔디광장에 직접 올라타 볼 수 있는 모형 말이 있다. 말에 올라앉으면 곽재우 장군 뒤를 따르는 병사가 된 듯하다. 공원 안에는 산책로, 연못 전망대, 정자 쉼터, 그네 등 걷고 쉴 수 있는 곳이 많다.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좋다. 가을 낭만과 의병 정신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가을 인생사진 명소로 이름난 은행나무길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잠깐만.” “사진 찍으니까 너무 예쁘게 나온다.” “여기가 SNS에서 봤던 포토존인가 봐.” 평일인데도 작은 시골 마을의 도로가 북적거렸다. 손을 꼭 붙잡고 걷는 연인,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중년 부부, 팔짱 끼고 미소 짓는 모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앵글 잡는 사진가, 함박웃음 가득 지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까지.

‘노란 은행잎 잔뜩 달린 나무 아래 노란 은행잎 카펫 밟고 지나는 모습’은 가을 은행나무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상상하는 그 모습 그대로 펼쳐진 곳이 바로 이곳 경남 거창군 거창읍 학리의 의동마을 은행나무길이다. 평소에는 관광객이 찾을 일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지만 은행나무가 황금 옷을 입는 계절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011년 제1회 거창관광전국사진공모전 때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 ‘#가을핫플’ ‘#인생사진’ ‘#단풍맛집’ 등의 태그를 달고 SNS에서 유명한 단풍 여행지가 됐다. 사진작가들의 가을 출사지와 웨딩사진 촬영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아월천을 가로지르는 의동교를 건너면 곧장 황금빛 은행나무길이 시작된다. 100m 남짓한 짧은 길이다. 인도가 아닌 차도이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은 많지 않다. 잎을 풍성하게 달고 있는 은행나무들이 도로 양쪽으로 팔 벌리고 서서 황금빛 터널을 이루고 있다. 높고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니 걸음이 느려지고 셔터를 누르는 손은 바빠진다. 나무 아래 놓인 벤치, 무심히 세워진 자전거, 하얀 비닐하우스, 낡은 창고까지 가을 추억의 한 장면이다.


수령 1000년으로 추정되는 함양군 운곡리 은행나무. 수령 1000년으로 추정되는 함양군 운곡리 은행나무.

의동마을 한 곳만 보고 거창까지 달려가기엔 아쉬울 수 있다. 은행나무의 매력에 더 빠지고 싶다면 차로 30여 분 거리의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를 함께 둘러봐도 좋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나무는 서하면 은행마을이 생길 때 심은 나무로 전해지며, 수령은 약 1000년으로 추정한다. 높이 34m, 나무 둘레 8.5m다. 이 나무 앞을 지나면서 예를 갖추지 않으면 그 집안과 마을에 재앙이 찾아든다는 전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마을에서 이 나무를 베려다가 마을에 잇단 재앙이 들어 제사를 지내고 난 뒤 평화를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나무가 돛대 역할을 해 마을을 지켜준다고 한다. 은행나무 앞쪽으로 흐르는 은행천을 따라 ‘은행나무 마실길’이라 이름 붙은 산책로가 있다. 지난달 27일 이곳을 찾았을 땐, 마실길의 작은 은행나무들은 샛노란 옷을 입었지만 천년 은행나무는 이제 막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지금쯤이면 황금빛 위용을 떨치고 있을 것이다.

가을 색을 눈에 실컷 품고 돌아서면서 예쁜 은행잎 하나 소중히 주웠다. 올가을 펼친 책의 책갈피에 ‘2022년 가을’을 꽂아둘 참이다. 옛 추억을 소환하는 데엔 ‘아날로그 감성’이 적절할 테니.


▷여행 팁: 내비게이션에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를 목적지로 하고 가면 좁은 마을 안길로 안내해 당황할 수 있다. 마을 입구에서 ‘곽재우 의병장 생가’ 안내판을 따라 가면 잘 닦인 길로 주차장에 닿을 수 있다. 세간리 은행나무는 이번 주말께 절정에 이를 듯하다. 거창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근처에 공식적인 주차장은 없다. 주변 도로 갓길에 주차해야 한다. 이번 주말엔 노란 카펫이 더 깔릴 것이다.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 마실길을 걷고 싶다면 진입로 쪽 공터에 주차하면 된다. 은행나무 인근에도 작은 주차장 두 곳이 있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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