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삭인 몸의 언어, 부산은 춤 역사의 살아 있는 현장 [新 문화지리지 2022 부산 재발견] 9.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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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화지리지 2022 부산 재발견] 9. 춤의 고장, 부산

‘영남은 춤, 호남은 소리’ 입증한 한국 춤 중심지
70년 넘게 춤판 지킨 김진홍 등 전통춤 토대 굳건
한때 춤판 이끌었던 대학 무용학과 줄줄이 폐과
다양한 독립 춤꾼 열정 덕에 춤판은 현재 진행형

‘부산 춤의 살아 있는 역사’ 김진홍. ‘부산 춤의 살아 있는 역사’ 김진홍.

“삭이는 춤, 내면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춤이 바로 부산 춤”이라는 김진홍 선생. 70년 가까이 부산 춤판을 지키며 춤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그의 말은 “춤은 동시대인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하는 광장”이라는 젊은 춤꾼 박재현의 말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세월을 뛰어넘는 춤은 개인과 사회, 국경마저 초월한 몸의 언어다.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우리 춤에서 부산은 동래야류 등 전통적인 마당춤은 물론 해외서 유입된 외국 춤이 한국 춤과 결합해 다양한 공연예술 춤으로 성장했다. 부산은 그야말로 크로스오버 춤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인 셈이다. 춤의 여러 갈래 가운데 무대 공연을 중심으로 부산 춤의 역사를 훑고자 한다.


춤꾼 엄옥자(국가무형문화재 승전무 예능보유자). 춤꾼 엄옥자(국가무형문화재 승전무 예능보유자).

■피란수도 부산은 ‘춤의 르네상스’

춤꾼 김해성(부산여대 아동스포츠재활무용과 학과장)은 논문을 통해 “일찍이 부산은 동래를 중심으로 권번이 발달하여 자연히 춤과 놀이가 성행한 전통춤을 가진 고장 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영남은 춤, 호남은 소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다.

현대무용 박용호, 발레 김향촌이 합동연구소를 열고, 박이랑 옥파일 조말선 등이 아동무용 교육을 펼치며 다양한 춤이 보급됐던 부산이 춤의 중심지가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전쟁 때였다. 무용계에서는 한국전쟁을 놓고 ‘단절과 공백의 기간’으로 표현하지만, 여기서 간과된 것이 바로 ‘부산’이라는 공간이다. 전쟁 와중에도 무용 공연과 교육이 이어지면서 피란수도 부산은 ‘한국 춤 역사의 단절을 막아내고 계승한 역사적인 공간’이자 ‘춤의 르네상스’를 이끈 역사의 현장이었다.

1947년 부산 토성동 자택에 ‘민속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부산 춤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던 추강 김동민(1910~1999) 선생은 전쟁의 힘겨웠던 시기, 먹고살기 급급했던 춤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현 국립국악원 전신인 ‘이왕직 아악부’가 민속무용연구소에 임시 간판을 걸었으며, 국립국악원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임시 사무실을 연 뒤에도 민속무용연구소에서 강습회를 열곤 했다. 춤꾼 김온경(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선생은 “당시 춤꾼들 사이에서 부산에 다녀왔다고 하면 김동민 안부를 묻는 게 먼저였다”고 회상했다. 김동민은 전쟁 한창이던 1951년, 부산극장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온경이 주연을 맡았던 당시 작품은 규모가 큰 행사였으며, 부산 극무용의 시초로 꼽히기도 했다.

춤꾼 허경미. 춤꾼 허경미.
왼쪽부터 춤꾼 박재현. 왼쪽부터 춤꾼 박재현.

■환도 이후 부산 춤, 큰 도약

휴전 이후 상당수 무용인이 고향 또는 서울로 발걸음을 옮기자 부산 춤판은 잠시 주춤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1957년 부산 최초로 무용인들의 권익집단인 부산무용가협회가 결성됐고 마침내 부산무용예술인협회로 정비됐다.

‘부산 예술 춤의 터전을 다지는 데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무용평론가 강이문(1923~1992)이 “1960년대는 환도 이후 잔류한 무용인들과 기존의 토착 무용인들, 신진 무용가들이 새롭게 판을 구성하던 시기”라고 했듯, 부산 춤판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부산 첫 발레리노 김향촌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부산 최초 발레리나로 꼽히는 김혜성은 송준영 등과 함께 1960년 부산 최초 개인 사설 발레단 ‘푸리마발레단’을 창단했다. 당시 조예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조숙자는 부산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립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춤꾼 신은주. 춤꾼 신은주.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같은 해 부산무용협회가 만들어졌고 한성여자초급대학(현 경성대) 체육과에 무용 전공이 도입됐다. 동래의 마지막 한량으로 일제강점기 식민정책으로 중단됐던 각종 민속 예술을 부활시키는 데 앞장선 문장원(1917~2012)의 활약으로 부산에선 1967년 동래야류가, 1971년엔 수영야류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부산에서 춤으로는 처음으로 동래학춤이 1972년에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문장원과 함께 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이자 ‘부산 춤의 살아 있는 역사’ 김진홍도 빼놓을 수 없는 춤꾼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열린 무용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무용계에 입문한 그는 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무용 부문에서 승무로 장원에 오르면서 전국 춤판에 이름을 날렸다.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을 비롯해 각종 무용제 운영위원장을 역임하며 부산 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남은 별’이라는 테마의 새로운 명무전을 기획하며 조만간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1968년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한 전국적인 무용예술제전이 부산에서 열리게 된 것은 황무봉(1930~1995)의 활약이 컸다. 1960년대 신무용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부산 최초 ‘부산명보소녀가무단’을 창단하는 등 창작무용이 부산에 뿌리내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산조춤은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며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1970년대 부산 춤 지형은 여러모로 획기적이었다. 1973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산시립무용단이 꾸려진 것이 대표적이다. 부단장은 강이문, 안무장은 황무봉과 송준영이, 단무장은 손세란이 맡았다. 하지만 부산을 대표하는 춤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열악했다. 김진홍은 “당시 단무장을 맡았던 손세란(본명 손영애)이 하나뿐인 모피를 저당 잡혀 빌린 돈으로 무대 설치 비용 등을 갚았다”고 회상했다. 같은 해 부산시민회관이 세워진 것은 부산 무대 공연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춤꾼 김온경(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춤꾼 김온경(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춤꾼 최은희. 춤꾼 최은희.

■춤 이끈 대학 무용

지역 대학에 무용학과가 잇따라 개설되면서 무용계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1979년 부산여대(현 신라대)에 무용 전공이 체육학과 내 개설됐으며, 1980년대 들어 부산여전(현 부산여대), 경성대 등에도 체육무용학과가 만들어졌다. 부산대와 동아대에선 독자적인 무용학과가 만들어졌으며, 1987년엔 부산예술고등학교에 무용과가 개설돼 차세대 무용수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대학이 중심”이었다는 무용평론가 이상헌의 말처럼, 최은희 김형희 이혜경 등이 서울에서 주목받았고, 부산현대무용단과 줌현대무용의 창단공연과 김희선 정미숙 목혜정을 중심으로 한 춤패 배김새, 신인 신은주의 춤판 등이 시선을 모았다. 기업이 후원한 무용단으로서는 국내 처음이었던 럭키그룹의 ‘럭키무용단’도 이 시기 창단됐다.

경성대가 주최한 부산여름무용제와 함께 1990년 처음 마련돼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대학무용제 역시 주목할 만하다. 대학무용제 운영위원장 김해성은 “학교 간 선의의 경쟁과 실력을 뽐내는 대학무용제는 새 춤꾼들의 탄생을 알리는 장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독자적인 무용 체계를 구축한 ‘독립군’들의 활약도 이후 부산 춤판을 보다 풍성하게 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김형희는 하야로비현대무용단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트러스트 현대무용단을 발족해 활동했다. 춤공간 SHIN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한 신은주는 부산국제춤마켓을 13년간 이끄는 등 춤의 국제교류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국립부산국악원 예술감독 정신혜(신라대 교수) 역시 ‘동인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무용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던 시기’ 이미 독자적인 무용단을 꾸려 주목할 만한 작품을 빚어냈다. 김옥련은 열악한 발레 환경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창작품을 선보이며 부산 민간 발레계에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허경미 역시 부산시립무용단을 그만둔 뒤 허경미무용단 무무를 만들어 활발히 활동 중이다.

제1회 전국무용제를 부산에서 치렀고, 2005년 부산국제해변무용제로 출발해 2008년 부산국제무용제로 이름을 바꾼 뒤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전 세계 무용인들이 모여 몸짓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부산 춤의 힘이다.

■그래도 춤은 계속된다

2011년 동아대를 시작으로 경성대, 신라대 등 지역 대학 대부분의 무용학과가 폐과 수순을 밟았다. 부산에서 독자적인 학과로 존재하는 곳은 부산대가 유일하다.

그래도 춤꾼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정신혜는 “춤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라며 “새로운 춤으로 탈바꿈할 기회”라고 말했다.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면 다양한 형태로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춤꾼 김남진은 “진정한 유럽식 아카데미를 만들어 실질적인 부산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고 말했으며, 춤꾼 윤여숙은 “예술을 보존하는 데 지자체의 책임이 있는 만큼 시립예술대와 같은 시 차원의 전문적인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춤꾼 김평수(부산민예총·한국민예총 이사장)는 “천편일률적인 지원금에서 벗어나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을 존중할 수 있는 지원이 우선”이라며 지역 예술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제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금정산을 무대로 한 강미리 할무용단 ‘개벽의 춤’. 금정산을 무대로 한 강미리 할무용단 ‘개벽의 춤’.

부산을 터전으로 한 춤꾼들의 노력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동래야류를 현대로 재해석한 국립부산국악원의 ‘야류별곡’은 서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김옥련 신은주가 부산 춤판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가운데 허경미 박재현 이용진 등이 활기를 더하고 있다. 전통춤에선 윤여숙 김갑용뿐만 아니라 유은주 정해림 강미선 하선주 황지인 이민아 윤정미 남선주 김정원 구성심 이혜진 등이 명맥을 활발하게 잇고 있으며, 한국 창작춤에선 정미숙 변지연 박성호 이연정 강경희 박연정이 무대를 누비고 있다. 현대무용에선 정기정 안선희 방영미 박은지 이언주 허성준 이이슬 박미라가, 발레에서는 서정애 정성복이 다양한 작품으로 관객들을 찾고 있다.

신은주는 “시대의 흐름이 달라지면서 춤도 달라질 것”이라 말했다. 크고 작은 곳곳의 자리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다양한 세대의 부산 춤꾼들. 그들이 이뤄 나갈 또 다른 형태의 춤, 바로 부산 춤의 미래다.

특별취재팀=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도움말 및 자료제공=이상헌 무용평론가, 김진홍 김온경 윤여숙 신은주 김해성 정신혜 김남진 박재현 김평수 무용가

사진=윤민호 yunmino@naver.com

그래픽=비온후 김철진 대표 beonwhobook@naver.com

부산일보사 부산문화재단 공동기획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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