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냉정과 열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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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어중간한 중용 내세울 게 아니라
뜨거운 의지·냉철한 분석 겸해야
아쉬움·후회 없는 삶 비로소 가능

예감은 들어맞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난해한 문제풀이들을 열심히 외웠지만 뒤죽박죽이었다. 정답일 것 같다는 느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성적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공부에는 냉담했던 까닭이다. 흥미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누가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 오기가 났다. 수학 정석을 팠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야 했다. 고2 겨울방학 때였다. 완전히 혼자 힘으로 풀어낸 문제들은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고, 수학의 재미를 알게 했다.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릴수록 전의가 불탔고, 해결했을 때 성취감은 천하를 얻은 듯했다.


수학의 세계에 더 열정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계산을 넘어 심오한 자연철학적 개념들이 거기에 녹아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다. 생전 처음 접하는 새로운 개념들로 생각의 지평을 넓혀 갈 수 있었다. 혼자 해 내야 하는 냉정한 싸움이었다. 인내 끝에 도달한 성취엔 새로운 열정의 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재미있는 것을 왜 그렇게 질리고 무섭게만 느꼈었는지, 성적과 경쟁만 있었을 뿐, 교육은 거기 없었다. 어쩌면 교육은 열정에 스스로 불을 지피게 하는 냉정한 도움이다. 내 평생에 미칠 만한 것이라고는 음악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 ‘업’으로 삼게 되는 순간 정작 좋아하는 음악은 거기 없을 거라는 음악 선생님의 말씀은 얼마나 당혹스럽게 냉정했던가.

하늘의 문학이라는 기대로 찾아갔던 천문학은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천문학자처럼, 별 보기를 업으로 삼으면 내가 좋아하는 별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7년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 사회학과 뼈아픈 우리의 근현대사, 모순 덩어리의 사회문제들에 빠져들면서, 도시빈민의 문제와 제도교육의 염증 속에서 산동네에 야학을 세웠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제 공부는 끝이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에 흥미를 완전히 잃고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떠났던 유학길에서, 입학허가서를 수월하게 받으려고 물리학과를 지원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물리학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독일의 고풍스러운 성 밑, 고즈넉한 물리학과 건물에 들어섰는데, 공작기계가 가득한 공장이어서 건물을 잘못 찾았나 싶었다. 어렵게 찾아 들어선 물리학 대형 강의실. 2층 높이의 투명한 아크릴 진공 원통 안에서 거짓말처럼 똑같이 낙하한 육중한 대포알과 새의 깃털은,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경탄할 것이었다. 자연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느낌은 그 어떤 수식이나 법칙보다도 강렬했다. 수학과 법칙의 냉정한 학문이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그 어떤 열정도 잃어버렸던 나의 호기심에 불을 질렀다.

냉담을 넘어 낙담도 있었지만, 여전히 냉정과 열정 사이를 꾸준히 오가고 있다는 것은 무척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냉정과 열정은 그 둘의 중용을 통한 미지근함이 아니라, 서로 기억도 못할 만큼의 아득한 거리를 쉴 새 없이 오고 가야 하는 기민함이 핵심이다. 자칫 열정이 뜨거운 의지를 불태우는 집념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냉정함으로 통제되지 않는 열정은 일을 망치기 일쑤다. 과학은 열정적인 관심과 호기심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주도면밀한 예측과 실험, 그 결과의 분석을 통한 결론은, 그 불확실성까지도 포함해야 하는 엄밀한 냉정함을 필요로 한다.

뉴스가 보기 싫은 요즘이다. 나의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촛불을 들었을 때의 그 열정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라 걱정에 열심이 뻗쳐서 촛불을 들 때만 해도, 이런 미래는 상상도 못했던 것일까. 언제 그랬냐는 듯 냉담하게 돌아선, 기억조차도 아득한 열정에 대한 추억이 어쩌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 열정으로 이룩한 것이 결국은 이 모양이라니.

낙담하는 일도 열정을 바친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절대로 없듯이, 이 냉담도 다시 뜨거워지기 위한 새로운 준비일 게다. 진정 뜨거운 열정을 품지 않고서는 그 어떤 냉정함도 인내하며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딜지언정, 미련 없이 세상을 쉽게 등져 버리는 일만큼은 꿈도 꾸지 말도록 하자. 남겨진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기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기 때문이다. 열정이 다시 살아나기까지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존버’할 일이다.

곧 수능일이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관심과 열정도 조만간 지나가 버리겠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준비한 만큼 아쉬움과 후회 없이, 열정을 냉정하게 불태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지긋지긋하던 수능 준비로부터 해방될 그대들과 더불어 우리네의 삶도 다시금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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