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신춘문예-희곡 심사평] 시적인 리듬감 갖춘 도전적인 실험성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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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 김지용

대다수의 희곡과 시나리오는 삶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체로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었고, 염세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작동된 자연주의 작품도 제법 보였다. 응모작에서 빈번하게 언급된 단어를 소개하자면 집주인, 월세, 시험, 취직, 백수 등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젊은 세대들의 불안감이 내 머리를 흔들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희곡은 다음의 세 편이 인상적이었다. 안유현의 ‘지구 반대편에서 스쿼트를 하는 사람들’은 단막극의 형식과 규모 안에서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를 개성적으로, 넘치지 않게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휘영의 ‘파란’은 고래를 도시로 끌어들인 상상력이 매력적이다. 주은길의 ‘산은 말한다’는 분절된 구성이지만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흡입력이 있다.

시나리오는 두 편이 눈에 들어왔다. 조정임의 ‘그녀가 돌아왔다’는 죽음을 앞두고 돌아온 여자의 마음과 그걸 받아들이는 남자의 마음 사이에 잔잔한 감동이 있다. 같은 작가의 ‘생의 어느 순간 지독한 수치심이 몰려왔다’도 비슷한 느낌으로, 지리멸렬한 일상에 특이한 파동을 일으켜 사건을 일으키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솜씨가 좋다.

많은 망설임 끝에 주은길의 ‘산은 말한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실제 공연에서 여우목도리의 형상화에 애로점이 있겠지만, 인물들이 구사하는 대사가 시적인 리듬감을 갖추고 있고, 우화적인 상상력과 더불어 도전적인 실험성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글 속에는 칼이 있다. 언젠가 관객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새길 수 있는 극작가가 되기를.

심사위원 김지용 극작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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