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주말]평안한 새해를 기원합니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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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올해 마지막 날이자 토요일입니다. 주 사이의 경계이면서 해 사이의 경계인 날, 저희 뉴스레터 브랜드 '경건한 주말'이 찰떡 같이 어울리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올해 어떻게 보내셨나요? 새해엔 무슨 계획을 세우시는지요?


부산일보가 지난 6월 첫 발송을 시작한 뉴스레터 '브레드' 로고. 부산일보가 지난 6월 첫 발송을 시작한 뉴스레터 '브레드' 로고.

말 걸기와 올바른 질문하기

우선 저희와 독자 여러분 사이의 관계부터 살펴봅니다. 부산일보가 아침마다 구독자 여러분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게 오늘로 딱 7개월입니다. 돌아보면 올해는 편지쓰기를 시작한 해라는 의미 정도만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허술하고 부족해 새해부터 할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말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언론은 기자들이 취재해 쓴 기사를 각 언론사 기준으로 편집해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전하기만 했습니다. 스마트폰 보유율이 1인당 1대를 넘긴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미디어가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언론사들은 인터넷 등장 이후 급속히 떨어지는 매출과 구독자를 붙잡을 방법을 찾다 이제서야 독자 여러분께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일보 뉴스레터 '브레드'는 아직 그날 주목할 뉴스 5~7가지만 추천하는 일방적인 방식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나한테 말 거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엔 부족합니다. 내년부터는 여러분의 다양한 관심과 취미를 뉴스레터로 해소하며 공감하도록 구색을 다양하게 갖추려 합니다. 뉴스레터 아래 취재해주길 바라는 내용이나 의견을 전송하는 버튼을 눌러 저희에게 말 걸어 주시면 언제든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올해 부산일보 전체 보도 중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산복빨래방' 기획의 포인트는 현장의 말을 듣기 위해 현장에 공간을 만들고 기자들이 상주하며 취재 대상인 주민들과 장기간 어울려 지냈다는 겁니다. 공부를 하든, 예술을 하든, 도를 닦든, 취재를 하든 그 성패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능력에 달렸다고 합니다. 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물으려면 오랜 준비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체계화된 정보가 많아야 하고, 정서적 공감대도 필요합니다. '산복빨래방'은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각각의 역사로 간직한 어르신들이 스스로 옛일을 떠올리며 술술 말할 만큼 신뢰를 쌓은 결과였습니다.

비록 이메일을 통해서지만 저희 뉴스레터는 매일 아침 여러분의 이메일함과 스마트폰 부산일보앱을 노크하겠습니다. 여러분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더 귀를 열겠습니다. 마침 내년이 귀가 큰 토끼해네요^^


지난해 하반기 최대 화제작인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마지막회. 윤현우 팀장이 혼수상태에서 깨며 진도준의 복수극이 모두 꿈으로 돌아간다. 드라마 캡처. 지난해 하반기 최대 화제작인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마지막회. 윤현우 팀장이 혼수상태에서 깨며 진도준의 복수극이 모두 꿈으로 돌아간다. 드라마 캡처.

결말의 배신 '재벌집 막내아들'

올 하반기 드라마 가운데 최대 화제작인 '재벌집 막내아들'이 지난 25일 막을 내렸는데 후폭풍이 만만찮습니다. 원작인 웹소설과 다른 결말 때문인데, 속 시원한 복수로 끝난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재벌집 막내 손자 진도준이 그동안 빌드업해온 복수극을, 결국 '재벌가 뒷감당 팀장' 윤현우의 꿈에서 펼쳐진 일로 마무리해 개운하지 못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의 꿈', 이를 영화로 만든 배창호 감독의 '꿈'이 떠올랐습니다. 속세의 욕망이 허무하다는 걸 꿈으로 깨우친 조신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복수극의 허무한 결말에 시청자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굴지의 재벌가가 내부의 누군가에 의해 단죄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설에 열광했던 팬들은 그 통쾌한 사이다맛에 환호했던 겁니다. 현실이 너무 고구마 삼킨 것처럼 답답하니까. 앞으로도 변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까. 소소한 복선과 연결지점의 논란은 차치하고, 이를 각색한 작가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실현 불가능한 일로 소설처럼 끝맺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 됐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현실이 고구마인데, 가상의 사이다가 무슨 소용. 이런….

지난 1년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계획한 일이 계획대로 마무리된 적보다, 그에 못미치거나 생각 못한 결과로 끝난 적이 훨씬 많지 않던가요? 가끔 오르는 산도 처음 마음 먹기가 귀찮고, 가파른 오르막을 헐떡이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땐 이런 힘든 일을 뭐하러 하나 싶다가도, 꾸역꾸역 오르다 보면 결국은 정상에 이릅니다. 그런 점에서, 한 해의 성취도만 따질 일이 아닙니다. 아직 정상에 오르지 못했어도 귀찮은 짐을 싸 산행길에 내디딘 첫 걸음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런 작심과 첫걸음이 없었다면 정상도 없습니다. 정상에 오른 많은 이가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거라고.

SNS로 엿보는 타인의 삶은 매일이 화려하고 멋진데, 내 삶은 왜 이 모양일까 한심한 생각이 든 적도 있지요. 우리 사회 병폐 중 하나인 '비교'가 비대면 시대를 맞으면서 SNS에서 '보이는 삶'을 지고의 가치로 만들어가는 모양새입니다. 보이는 멋진 삶의 집약체가 '재벌집 막내아들' 속 진도준입니다. 가문, 돈, 지성, 외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 현실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모든 이는 윤현우처럼 삽니다. '비교하지 말고, 내 기준으로 살아가기.' 윤현우가 드라마 결말에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그 나름의 단죄와 복수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의 자세를 지켰기 때문이리라고 해석해봅니다.


지난달 9일 크림반도 항구도시 세바스토폴 한 기차역에서 러시아군 주둔지로 떠나는 징집병이 열차 창문에 입맞추며 가족과 작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9일 크림반도 항구도시 세바스토폴 한 기차역에서 러시아군 주둔지로 떠나는 징집병이 열차 창문에 입맞추며 가족과 작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걸어가며 쌓이는 인생, 시

올해 부산일보가 꼽은 10대 뉴스 중 국내·세계 부문1위는 각각 10·29 이태원 참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이 글로벌 패권을 더 공고히 하려는 데 대해 러시아, 중국, 이슬람권 등의 도전도 더 청예해질 새해입니다. 경제와 정치외교 모두가 쉽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도 202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더 심각한 대립과 갈등, 합종연횡이 예상됩니다. 생각해보면 언제 새해 전망이 밝다는 얘길 들어본 적 있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처럼 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마침 새해를 앞둔 연말이라 생각하니 최근 읽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가 준 울림이 큽니다. 브레히트는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에서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대를 위해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길을 걷는다고 하고, 셰익스피어는 '소네트22'에서 내가 그대를 위해 나를 돌보듯, 그대도 아이가 다칠까봐 노심초사하는 유모처럼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합니다. 신형철은 두 문호가 갖는 사랑의 태도에 공통점이 있는데, 이를 '조심'이라고 봅니다. 한자 '조(操)'를 풀어 손으로 나무 위의 새를 잡는 모양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조심'은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으로 나부터 내 마음과 몸을 조심조심 지켜나가야 겠습니다.

시를 분석하는 신형철은 시가 곧 삶이고 인생이라고 봅니다. 행(行)과 연(聯)으로 이뤄지는 시는,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行) 아래로 쌓여가는(聯) 일. 걸어가며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므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뤄진다고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라는 연작시의 2023년 편은 어떤 행과 연으로 이어질까요?


P.S. 뉴스레터 '경건한 주말'을 도맡아 출범시킨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가 지난 27일 코로나19에 확진되는 바람에 '아재 기자'가 덜컥 이 부담스러운 순서를 잠시 대신했습니다. 풍성한 문화 콘텐츠와 스포츠 소식으로 2030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만든 그의 노고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코로나19가 다시 유행하는 분위기입니다. 누군가의 자녀이자 형제자매, 부모이거나 앞으로 부모가 될 당신,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바이러스와 추위로부터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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