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야?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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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 등 회빙환 드라마 열풍
'이생망' 현실 '인생 리셋' 대리 욕망 담겨

아내가 정주행 중인 드라마의 제목을 보고는 혀를 찼다. 재벌을 우려먹다 못해 이제 막내아들까지 파는구나. 한심하게 생각하며 같이 보기 시작했는데 진양철 회장 역할로 나온 배우 이성민의 신들린 연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기억에 생생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펼쳐지며 생기는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 그걸 샀더라면 지금 이런 글이나 쓰고 있지 않을 텐데….' 아무 쓸모 없는 후회와 아쉬움도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의 종영과 함께 끝이 났다. 이처럼 '회빙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요즘 아주 인기라고 한다. 회빙환이 대체 뭐길래 우리 옆에 찰싹 달라붙은 것일까.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JTBC


■ 어게인, 내일, 금수저 등 쏟아져

회빙환(回憑還)은 회귀, 빙의, 환생의 앞 글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이 웹소설의 공식이 될 정도로 유행하면서 만들어진 용어다. 주인공이 회빙환을 통해 지금 세상보다 앞선 지식과 경험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능력이 남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회빙환 장르는 빠르고 시원한 사이다식 전개가 특징이어서 10~12부작으로 짧아지는 요즘 드라마 트렌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2022년 한 해 동안 '재벌집 막내아들' 외에도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 '내일(MBC)', '금수저(MBC)', '환혼(tvN)' 등이 회빙환 설정을 이용했다.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제목만 봐도 회귀 드라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권력자를 심판하려다 죽은 검사가 재수생 시절로 회귀해 악을 응징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전 삶의 기억을 가지고 앞서나가며 치밀하게 옭아매니 복수극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부터 일본의 주요 OTT 플랫폼을 통해 일본 현지에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내일'은 환생을 다뤘다. 우리 사회에는 절망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내일'은 죽은 자를 인도하던 저승사자들이 목숨을 살리는 임무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다. 학교폭력, 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 악성 댓글, 청년 우울증, 생활고 등 타살에 가까운 죽음들을 '위기관리 저승사자'라는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해결한다. '금수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친구와 운명을 바꿔 후천적 금수저가 된다는 판타지다. '환혼'까지 포함해 지난 한 해 회빙환 드라마가 이렇게나 많았다.


드마라 '어게인 마이 라이프' 포스터. SBS 드마라 '어게인 마이 라이프' 포스터. SBS

■ 특권이라는 생각, 안 해 본 거야?

같은 제목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회귀물 드라마다. 회귀물은 현실에서 실패한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몸으로 인생 2회차를 살며 성공해 복수한다는 내용이 일반적이다. 흙수저 윤현우가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 승승장구하는 스토리에는 피가 끓어오르도록 욕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진도준은 분당이 별 볼 일 없는 시절 분당 땅을 콕 찍어서 5만 평을 증여받아 종잣돈으로 사용한다. 요즘엔 '천당 위의 분당'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큰돈 벌기도 식은 죽 먹기다. 진도준이 그랬던 것처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모아 환차익을 얻고, 사람들이 관심 없을 때 아마존이나 애플의 주식을 사고, 9·11테러 직전에는 주식을 죄다 팔았다가 직후에 매집하면 쉽게 큰 부자가 된다. 이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도 일찍부터 사 모으고 싶다.

알고 보니 '막내아들'은 다 계획이 있는 제목이었다. 대단한 금수저 진도준도 순양 안에서 펼쳐지는 장자 승계 원칙 아래에선 상대적 약자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재벌집에서도 계급과 서열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는 대물림된 힘이 토대가 되어 불공정한 사회를 만든다는 문제의식이 의외로 잘 드러났다. 진도준이 서울대 법대 동급생 서민영에게 "법조계 명문가인 너희 집안, 건강한 몸, 좋은 머리 그 모든 게 태어날 때부터 너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생각 정말 단 한 번도 안 해 본 거야?"라고 묻는 대목이 그랬다. 진도준은 사업 파트너 오세현에게 "사람들 참 이상해요. 북쪽에서 김 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공정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웹툰 '이번 생도 잘 부탁해'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이번 생도 잘 부탁해'의 한 장면. 네이버

■ 금수저 될 수 있다면 뭐라도

2010년대 후반부터 회빙환 작품은 웹소설·웹툰계의 대세였다. 이처럼 회빙환 작품이 인기를 끌며 비슷한 작품의 영상화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네이버 시리즈 조회수가 1억 6000만 회를 넘는 인기 웹소설이자 빙의물인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화화도 준비 중이다. 소설의 독자였던 주인공이 책의 세계로 빙의되어 펼쳐지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평사원에서 CEO가 되었지만 인생을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찾아온 인생 2회차를 다룬 웹소설 <상남자>의 드라마화도 진행되고 있다. 환생을 거듭한 여자가 18번째 전생에서 만났던 남자와 다시 만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룬 웹툰 <이번 생도 잘 부탁해>도 올 상반기에 드라마로 방영된다.

사람들은 대체 왜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생망은 삶에 대한 희망 자체를 놓아 버렸다는 의미다. 회빙환은 이생망과 대구를 이룬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좀 더 일찍 부동산이나 암호화폐를 사지 않아서, 이제는 살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인생도 게임처럼 리셋하고 싶은 욕망이 웹소설에 투영되었고, 다시 드라마로 구현되어 회빙환이 안방에 대거 출현하는 것이다. 회빙환이라는 세계관의 유행은 한국 사회의 실패에 대한 공포, 성공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드라마 '금수저'의 시놉시스는 '이제 모든 이들의 욕망이 이 금수저를 향해 있다. 금수저가 될 수만 있다면 부모든 영혼이든 무엇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욕망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 에필로그: 웹소설 시장은 성장하지만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은 대기업 직장인이었던 산경 작가가 썼다. 이 작가의 월 매출은 1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가 2020년에 낸 <실패하지 않는 웹소설 연재의 기술>의 부제는 '퇴근 후 웹소설 써서 10억 벌 수 있다고?!'였다. 현실은 많이 다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은 2021년 6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고, 웹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들만 20만 명에 달한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웹툰·웹소설 플랫폼 창작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은 52.5시간, 절반은 연평균 수입이 1700만 원 이하였다. 카카오·네이버 등 플랫폼이 작가에게 떼는 수수료도 30~45%에 달한다. 2014년 드라마로 나와 큰 인기를 모은 '미생'에는 "회사가 전쟁터라면 나가면 지옥이다"라는 불후의 명대사가 나온다.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진정 없다는 말인가.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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