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조지문(弔紙文)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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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기자(記者)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지자(紙者)에게 고(告)하노니, 인간의 볼 것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전단(傳單)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이로다. 이 전단지는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神)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兪氏夫人)이 지은 국문체 고전 수필 ‘조침문(弔針文)’의 형식과 내용을 따라 ‘전단지의 종언(終焉)’을 위로해 보았다. 조침문은 부러진 바늘을 의인화하여 쓴 제문(祭文)으로 교과서에도 실렸다. 롯데마트가 1998년부터 25년 가까이 써 온 종이 전단지를 모바일 전단으로 전면 대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만감이 교차했다. 롯데마트는 친환경 경영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종이 전단지를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연간 150t의 종이 사용을 줄일 수 있게 됐으니 어쩌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유통업계를 비롯해 다른 분야에서도 연쇄적으로 종이 전단지가 줄어들 것을 생각하면 인쇄업계가 받는 충격은 적지 않을 것 같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전단지는 종이 신문과는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신문 배달은 보급소에서 전단지를 넣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신문을 펼치면 그 안에 두터운 전단지 뭉치가 들어 신문이 묵직하게 느껴지던 호시절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전단지 광고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신문과 전단지의 역사가 우리보다 훨씬 빠르다. 일본 최초의 일간지는 1870년부터 발간된 〈요코하마마이니치 신문〉이고, 1872년 〈동경일일신문〉에서 전단지 광고 배포가 시행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비하면 우리는 참으로 변화무쌍하다고 하겠다.

신문을 비하해서 ‘찌라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찌라시는 일본어로 전단지를 부르는 이름으로 ‘뿌리는 것’이란 뜻이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전 머니투데이 기자) 씨가 언론사 간부에 이어 기자 수십 명과도 금전 거래를 했다는 정황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짜라시에 기레기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숨이 넘어가는 종이 전단지는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 차례는 신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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