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배기 유골도 ‘기타’로 분류된 채 48년간 잊혔다 [‘방치된 비극’ 우키시마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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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출신 일가족 추정 4명 등
‘군속’‘기타’로 표기된 채 봉환
양산·파주 사찰에도 봉안 추정
일본 남은 유골 봉환 서둘러야
폭침 진상규명 특별법 여론도

부산 금정구 영락공원 제2영락원 지하 무연고자 봉안실에 보관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함. 총 194구 중 12구가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로 확인됐다. 부산일보DB 부산 금정구 영락공원 제2영락원 지하 무연고자 봉안실에 보관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함. 총 194구 중 12구가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로 확인됐다. 부산일보DB

‘일용(33·남), 봉순(14·여), 양자(4·여), 희미(2·여).’

부산 영락공원 지하 무연고자실에 48년째 잠들어 있는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이다. 1945년 8월 일본 마이즈루항에서 폭발과 함께 침몰한 ‘해방 귀국선’ 우키시마호에 탄 일가족 희생자로 추정된다. 이들의 성은 모두 일본식 성명 강요에 따라 ‘암본’. 본적도 옛 경남 양산군으로 같다.

광복 이후 고국에서 새 삶을 꿈꾸며 부산으로 향했지만 결국 한 서린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폭발은 네 살, 두 살배기까지 집어삼켰다.


■ 부끄러운 고국의 유골 관리

영락공원에는 1971~76년 일본에서 반환된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 1179구 중 유족이 없거나 찾아가지 않은 194구가 남아 있다. 1974년 12월 21일(190구)과 1976년 10월 28일(4구)에 보관된 것이다.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중 최소 12구가 우키시마호 사건의 희생자다. 충북 괴산군, 충남 공주군, 경남 의령군 등 전국 곳곳에서 징집된 이들이었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수천 명의 한국인을 수장시켰지만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군 기뢰에 의한 사고로 발표했지만, 당초 목적지가 아닌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한 것을 두고 일본의 고의 폭침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 일본 해군이 강제노역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배를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정황이 속속 발견돼 왔다.

1970년대 일본의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 반환 당시 우키시마호 피해자들은 따로 분류되지 않았다. 다른 강제동원 희생자와 함께 ‘군속’(군사시설 징용자)이나 ‘기타’로 표기된 채 봉환됐다. 봉환 직후 한국 정부도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을 따로 구분하거나 모니터링하지 않았다. 각계의 노력으로 어렵게 유골을 돌려받았지만, 당국의 사후 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2023년이 되도록 희생자 유골이 ‘깜깜속 안치’된 이유다.

실제 영락공원에서 확인된 12구도 어린 소녀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군시설부 기록에 군속으로 적시됐다. 더불어 〈부산일보〉 1974년 1월 30일 자 8면에 봉환 대상자 명단이 공개됐는데, 우키시마호 희생자는 ‘해군’과 ‘기타’에 포함됐다. 11세 이하 어린아이는 기타, 나머지는 해군이었다. 〈동아일보〉 1968년 10월 24일 자에 게재된 유골 명단에도 우키시마호 희생자는 ‘해군’으로 통칭됐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영락공원 내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 확인을 계기로 전국적인 현황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봉안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전국 각지에 안치된 강제징용자 유골을 전수 조사해야 한다. 유족회에 따르면 경남 양산시, 경기도 파주시 등의 사찰에도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단체, 추모 시설 등이 협력할 경우 파악에 걸리는 시간이 크게 단축될 수 있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봉환 명단이 적힌 1974년 1월 30일 자 〈부산일보〉 지면. 우키시마호 희생자는 ‘기타’나 ‘해군’으로 분류됐다. 부산일보DB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봉환 명단이 적힌 1974년 1월 30일 자 〈부산일보〉 지면. 우키시마호 희생자는 ‘기타’나 ‘해군’으로 분류됐다. 부산일보DB

■ 일본 남은 유골도 봉환 서둘러야

일본에 남은 유골도 당장 되찾아야 한다. 8000여 명이 탑승한 것으로 알려진 우키시마호의 참극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거의 남지 않아서다. 당시 사건을 기억할 만한 10세 내외의 아이가 지금은 80대 후반이다. 희생자 자녀도 대부분 고령이다. 유골의 추가 봉환과 사건의 진상 규명을 이끌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유족과 시민단체는 하루빨리 유골을 봉환하고 별도 추모 공간을 마련해 사건의 진상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키시마호유족회 한영용 회장은 “13세 때 배에 탔던 장영도 씨가 최근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제 사건을 기억할 만한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우키시마호에 탔던 장영도 씨는 아버지 장종식 씨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장종식 씨는 1945년 8월 당시 일제강점기 〈부산일보〉에 일본의 고의 폭침 의혹을 처음 제보한 인물이다.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부산에 거주하는 생존자 이 모(79) 씨를 확인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씨는 3세 때 배에 올라 모친과 함께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 되찾자”…다시 힘 모은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최근 한·일 강제징용 해법 논의가 뜨거워지는 분위기 속에 우키시마호 사건 재조명을 촉구한다. 이들은 지난달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지난달 26일 김홍걸 무소속 의원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관으로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는 유골 봉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한 회장은 “일본에 남은 유골을 반드시 모셔 올 것”이라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면 ‘고국에 유골을 모셔다 놨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현지 유골 신원 확인, 집단 매장지 추가 조사 등을 위해 일본 시민단체와도 협력을 강화한다. 현지에 남아 있는 유골은 수습 당시 분골, 합골돼 신원 파악이 쉽지 않다. 다른 지역의 안치 현황도 민간 차원에서 다시 파악할 예정이다.

동북아평화·우키시마호희생자 추모협회 김영주 회장은 “국내외 유골 현황 조사를 본격화할 예정이며, 우키시마호 진실 규명을 위해 그간의 연구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겠다”고 말했다.

이승훈·히라바루 나오코(서일본신문) 기자 lee88@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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