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훈훈한 ‘애프터썬’, 즐거운 ‘만찢남’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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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도 벌써 지나고, 2월 들어 동장군의 기세는 한 풀 꺾인 듯 합니다. 새해에 세운 다짐과 계획이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 주말 휴식과 힐링이 필요하다면, 영화 ‘애프터썬’과 예능 ‘만찢남’을 추천합니다.


영화 ‘애프터썬’(왼쪽)과 티빙 오리지널 예능 ‘만찢남’ 포스터 영화 ‘애프터썬’(왼쪽)과 티빙 오리지널 예능 ‘만찢남’ 포스터

형언하기 힘든 여운 남기는 영화 ‘애프터썬’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여운이 남아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지난 1일 개봉한 ‘애프터썬’은 그런 영화였습니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영화관의 조명이 켜진 뒤에야 일어났는데 아직도 앉아있는 관객들이 꽤 많습니다.

애프터썬은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 샬롯 웰스의 장편 데뷔작으로,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31세 여성 소피가 20년 전 아빠와 함께 떠났던 여행이 기록된 캠코더를 보며 추억하는 이야기입니다. 11살이던 소피(프랭키 코리오 분)는 여름 방학을 맞아 서른 살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튀르키예의 한 저렴한 리조트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리조트 타운에서 캘럼은 종종 소피의 오빠로 오해받습니다. 영화는 그의 사연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웰스 감독은 과거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사로 몰입을 해치는 대신 자연스레 추론할 수 있는 장치들을 심어뒀습니다. 캘럼은 소피의 엄마와 결별했지만, 서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은 캘럼은 소피와 작은 리조트 타운에서 지내며 스킨스쿠버를 즐기고 수영장에서 게을리 시간을 보내는 등 소박한 여행을 즐깁니다. 이 과정에서 그다지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 표현도 절제된 편입니다.


영화 속 캘럼의 모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속 캘럼의 모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캘럼은 딸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하는 좋은 아빠지만, 불우한 과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자격지심 많은 청년이기도 합니다.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고,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어느날 밤 그는 혼자 술에 취해 슬픔에 휩싸인 나머지 딸을 방치해버리고, 이후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빠집니다. 캘럼을 연기한 폴 메스칼의 표현처럼 “딸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캐릭터입니다.

유년기의 끝자락에 있는 소피는 어린 시절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성숙을 향해 달려갑니다. 반짝이는 눈으로 항상 주변을 살피고, 어른들의 세계를 알면서도 모른 척 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자식들과 함께하는 화목한 가족들을 할금할금 살핍니다. 아빠의 힘든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한 구석도 있다고 생각하던 소피는 점점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중요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덤덤하고 냉정하게 전달합니다.

그런데 애프터썬에는 관객을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인물의 감정 변화와 분위기를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시선으로 보여줘 관객이 감정선에 몰입하게끔 합니다. 영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는데, 숨죽이고 지켜보게 되는 묘미가 있습니다. 상영관이 관객들로 가득 찼는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방해가 될까 싶어 챙겨온 간식을 한 입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의 섬세함을 설명할 만한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웰스 감독만의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연출은 실로 독창적입니다. 영화 속 소피와 캘럼의 유대 관계는 두터우면서도 복잡합니다. 여행사의 실수 탓에 숙소에 침대는 하나뿐이지만 소피는 개의치 않습니다. 말없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침묵도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둘은 때때로 사소한 이유로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고 감정이 상해 어긋납니다. 미세하고 빠르게 감정이 변하지만, 둘의 유대감은 커집니다. 이 사소함을 세심한 촬영과 연출기법을 통해 영화로 묘사한 것이 웰스 감독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애프터썬’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애프터썬’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독특하고 신선한 연출 기법도 인상적입니다. 영화는 마냥 플래시백(과거 회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닙니다. 비현실적인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에서 춤을 추는 캘럼의 모습이 맥락 없이 등장하곤 합니다. 혹자는 이 끔찍하고 기괴해 보이는 환상을 꿈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보다는 20년이 지나 애인과 아기도 있는 서른 살 소피가 기억의 파편을 수집해 재구성한 아빠의 자아로 풀이됩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환상 속 소피와 캘럼의 모습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선곡 역시 훌륭합니다. 특히 종반부에 삽입된 노래는 너무나 유명하고 익숙한 명곡인데도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놀라운 호소력을 선보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에서 차마 못 먹었던 간식과 함께 노래를 감상하니 여운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노래를 들으며 다른 관객들이 쓴 실관람평을 살펴보니 아쉽다는 반응도 꽤 있습니다. 특별한 감동이나 직접적인 메시지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밋밋하거나 친절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상업영화의 빠른 호흡을 선호한다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공감하는 관객이 적지는 않습니다.

사실 애프터썬은 무척 사적인 영화입니다. 소피처럼 비교적 젊은 부모를 뒀던 웰스 감독이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튀르키예에서 보냈던 휴가를 떠올리며 만든 자전적인 작품입니다. 그래서 관객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감상 포인트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년 시절 소피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지점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크게 와닿는 지점이 있을 겁니다. 햇볕에 탄 피부를 진정시키는 크림인 ‘애프터썬’처럼,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따끔한 상처를 치유하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소피의 모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속 소피의 모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웰스 감독은 “저는 영화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진 않다”며 “인내심과 열린 마음을 갖고 영화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억은 까다로운 것이다. 디테일은 흐릿하고 변덕스럽다. 기억하려 애쓸수록 더 적게 보인다”며 “튀르키예어인 ‘hasret’은 그리움, 사랑, 상실의 조합을 뜻한다. 이 영화의 맥락에 특히 적절한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영화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프렌치터치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호평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영국 가디언지를 비롯해 인디와이어, 메타크리틱 등 6개 해외 매체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았습니다. 뉴욕타임즈(NYT)는 올해 최고의 영화 2위로 선정했고, 제22회 영국독립영화상에선 7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월드시네마에 초청돼 관객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배우들의 호연 역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800대 1의 경쟁을 뚫고 소피 역을 맡은 천재 신인배우 프랭키 코리오는 주요 외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캘럼을 연기한 스물일곱 살의 폴 메스칼은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전 세계 영화계의 관심이 쏠린 명작인데, 정작 상영관은 많지 않습니다. 그린나래미디어에 따르면 부산 소재 대형 멀티플렉스 중 개봉 첫 주에 애프터썬을 상영한 곳은 CGV서면점, 롯데시네마 센텀시티점이 전부입니다. 그 밖엔 영화의 전당, 부산 모퉁이극장, 오르페오 해운대 등에서 애프터썬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을 피우기 위해 합심한 이말년, 기안84, 주호민 작가. 티빙 유튜브 영상 캡처 불을 피우기 위해 합심한 이말년, 기안84, 주호민 작가. 티빙 유튜브 영상 캡처

만화에 갇힌 웹툰작가들…티빙의 야심작 ‘만찢남’

“저희가 해외여행 간다고 갔었잖아요. 6일짼데…6일 동안 무인도에서 살고 있어요. 기약이 없어요.”

지난달 27일 공개된 티빙(TVING) 오리지널 시리즈 ‘만찢남’(만화를 찢고 들어간 남자들)은 생존 야생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예능입니다. 이제는 ‘침착맨’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전 웹툰작가 이말년과 ‘쌍천만 작가’ 주호민, 독보적인 캐릭터를 갖춘 기안84 작가에 예능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모델 주우재가 합세했습니다. 유튜브와 TV를 넘나들며 인기를 끌고 있는 대세들을 한 데 모은 겁니다.

이말년, 주호민, 기안84는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지만, OTT 예능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유튜브 웹 예능인 ‘말년을 OO하게’ 시리즈를 연출했던 MBC D.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가 제작을 맡았습니다. 연출을 맡은 황재석 PD는 지난달 27일 제작발표회에서 “예능 대세인 네 사람을 모으면 기존에 볼 수 없던 신선한 틀을 깨는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만찢남은 제작진에게 속아 무인도에 갇혀버린 네 사람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림을 담았습니다. ‘정글의 법칙’이나 ‘무한도전’의 무인도 에피소드가 떠오르지만, 누군가가 그린 만화 속에 갇혔다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습니다. 스스로, 혹은 남이 그려놓은 만화대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도 신선합니다.

최고의 웃음포인트는 역시 출연진들의 ‘케미’입니다. ‘침착맨’ 이말년과 ‘주펄’ 주호민은 인터넷 방송으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콤비고, 기안84 역시 두 사람과 허물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킹받게’ 하는 지점들이 있어 예능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성입니다.

1, 2화에서는 기안84의 돌발행동과 이에 질색하는 이말년·주호민의 리액션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태어난 김에 사는 것 같지만 뭔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기안84의 집요함이 미션 난이도를 ‘셀프 상향’시킵니다. 엉뚱함으로는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이말년도 기안84의 기행 앞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저항 없이 웃음이 터집니다.

여기에 침착맨의 열혈 팬이자 엉뚱한 매력으로 ‘모델계 침착맨’ 소리를 듣는 주우재가 합류하면서 ‘침펄기주’ 조합이 탄생합니다. 체감온도가 40도에 육박하는 무인도에서 네 사람이 내는 불협화음이 예능적으로는 조화를 이룹니다.


지난 1월 27일 온라인으로 열린 티빙 오리지널 예능 '만찢남' 제작발표회에서 방송인 주우재(왼쪽부터), 웹툰 작가 침착맨(필명 이말년), 이보라 작가, 황재석 PD, 웹툰 작가 주호민, 기안84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티빙 제공 지난 1월 27일 온라인으로 열린 티빙 오리지널 예능 '만찢남' 제작발표회에서 방송인 주우재(왼쪽부터), 웹툰 작가 침착맨(필명 이말년), 이보라 작가, 황재석 PD, 웹툰 작가 주호민, 기안84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티빙 제공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행동을 하는 네 사람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불 피우기’ 미션을 던지자 이말년은 홀로 섬 곳곳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부터 줍는 수집 욕구를 보여주고, 기안84는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비과학적인 방법을 시도해 주호민을 경악하게 합니다. 4차원 매력의 주우재는 약점을 잡고 제작진과 협상을 벌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특히 기존에 이들을 좋아하던 팬층 일각에서는 연출이 아쉽다는 반응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전개가 다소 느리게 편집돼 늘어지는 느낌이 있고, 당초 홍보했던 ‘무인도 생존기’치고는 미션의 난이도가 높지 않아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반응입니다.

출연진을 보는 재미는 있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재미있게 구성된 것 같지는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 2화에 공개된 미니게임들은 그닥 신선하거나 흥미롭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과 별로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편집에서는 배경음악 활용이 특히 아쉬웠습니다. 상황에 비해 과한 음악이 깔리니 맥이 빠집니다.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닌데 스릴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악이 들리면 재미가 반감됩니다. ‘배경음악이 호들갑스럽다’는 한 누리꾼의 비판에 공감합니다.

출연진들의 케미를 모르는 일반 시청자들도 고려하다 보니 대중적으로 익숙한 편집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제작진이 같은 출연진으로 연출했던 10~20분 분량의 유튜브 영상들은 훨씬 속도감 있고 타이트하게 편집됐는데, 이러한 템포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본격적인 재미는 3화부터 시작됩니다. 출연진들이 무인도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격투기 선수 추성훈을 포함한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마찰이 일어납니다. 만찢남 에피소드는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티빙에서 공개됩니다.


고유어 부사 중에 ‘내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왕 일을 시작한 김에 더 나아가’라는 뜻과 ‘줄곧 한결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사를 다 읽은 김에 내처 기자 구독까지 눌렀다.’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애프터썬’과 ‘만찢남’으로 잠시 쉬어가시고, 새해에 세운 근사한 목표들을 내처 이루시기 바랍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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