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바람이 그린 풍경화 속으로”…'3대 설국' 강원도 백두대간 여행
홋카이도 부럽지 않은 ‘한국 3대 설국’
평창-강릉 잇는 고개 마을 '안반데기'
태백 매봉산 '바람의언덕'과 '귀네미마을'
우리나라 3대 설국 중 하나인 ‘안반데기’ 마을. 백설기를 포개 놓은 듯 두툼한 눈밭이 펼쳐진다.
현실이건 영화건 설경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일본영화 팬이라면 ‘러브레터’와 ‘철도원’을 떠올릴 듯하다. 20여 년 전 영화관 스크린을 가득 채운 새하얀 눈은 여전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두 영화의 배경이 된 일본 홋카이도는 연평균 적설량이 3m에 달해 설국(雪國)으로 불린다. 그런데 홋카이도 못지않은 ‘3대 설국’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한반도의 허리, 강원도 백두대간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을 만나고 왔다.
■평창-강릉 경계를 지워버린 설경
1박 2일의 여정, 눈길 여행이 익숙지 않은 취재진을 위해 국내여행 전문가이자 여행작가인 승우여행사 이원근 대표가 동행했다. 서울 수서역에서 출발해 강원도로 향하는 날은 때마침 전국적으로 눈·비가 그친 뒤였다.
첫 번째 목적지는 강원도 평창과 강릉을 잇는 고개 마을인 ‘안반데기’(옛 피덕령).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로 접어들 무렵부터 차 안은 ‘갤러리’가 된다. 차창 밖으로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눈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취재진은 안반데기를 향해 서(평창군 대관령면 수하리)에서 동(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으로 넘어가는 방향을 택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백두대간에선 절경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특히 알펜시아 리조트를 지나 도암호로 향하는 길 옆으로 무릉도원 같은 계곡이 펼쳐진다.
안반데기 눈밭을 시원하게 가로지른 눈썰매 자국.
안반데기 마을의 한 주택. 두툼한 눈옷을 입었다.
도암댐에 조금 못 미쳐 안반데기로 향하는 도로(수하로)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제설이 잘 돼 있었다. 다만 급하게 꺾이는 구간이 있어 주의 운전을 해야 한다. 고랭지농촌문화관인 ‘와우안반데기’가 보인다면 비로소 고개의 정상, 평창군과 강릉시의 경계에 도착한 것이다.
3대 설국 중 하나인 안반데기 마을은 북쪽과 남쪽으로 거대한 눈밭이 펼쳐진다. 곱디고운 눈 입자가 새하얀 모래사막처럼 보인다. 남쪽으로 옥녀봉을 향해 오르자 흰 도화지에 줄을 그은 듯, 눈썰매 흔적이 보인다. 백설기처럼 두껍게 내려앉은 눈밭이 마을 사람들에겐 천연 눈썰매장인 셈이다. 정오를 넘긴 시각,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햇살이 비치자 옥녀봉 주변 나뭇가지들이 반짝인다. 눈꽃(설화·상고대·빙화) 중에서도 희귀한 ‘빙화’이다.
반대편 북쪽 언덕에는 안반데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멍에전망대가 있다. 아쉽게도 현재는 폐쇄된 상태지만, 전망대 인근 주차장에서 바라본 풍경만으로도 눈과 가슴이 시리고 남을 정도다.
안반데기로 가는 도중 여유가 있다면 오대산 월정사도 들러봄 직하다. 경내는 물론, 금강교에서 시작하는 900m 길이의 전나무 숲길도 부담없이 산책하기 좋다. 간혹 바람이 불면 전나무에 내려앉은 눈꽃이 눈발처럼 휘날린다. 셔터를 누르는 족족 영화의 한 장면이다.
오대산 자연의 깊은 맛을 느끼고 싶다면 월정사 입구 산채백반거리를 들러보자. 3대째 운영 중인 ‘경남식당’은 주인장이 직접 오대산에서 나물을 채취한다. 산채정식 상차림엔 눈개승마·방풍나물·우산나물·표고나물·울취·갓취·제주취·얼레지 등 20여 가지 나물이 나온다. 나물을 콩기름에 무치지 않아, 고유의 향과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누구와 걸어도 추억을 쌓을 수 있다.
월정사 입구 산채백반거리에 있는 경남식당. 산채정식 상차림에 20여 가지 나물이 나온다.
■여름엔 푸른 배추밭, 겨울엔 하얀 눈밭
2·3번째 설국도 같은 백두대간이지만 행정구역상 강원도 태백시에 속한다. 시내에서 1박을 한 뒤 먼저 찾은 곳은 ‘매봉산 바람의언덕’. 서해로 향하는 한강,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 동해와 만나는 오십천의 분수령인 ‘삼수령’(피재)에서 매봉산길을 따라 2km 정도 차로 올라가면 언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덱이 나타난다.
전망대에 서면 광활하게 펼쳐진 눈밭과 함께 능선을 따라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 수십 개가 눈에 들어온다. 바람의언덕이란 이름에 걸맞은 규모다. 이 언덕의 또 다른 정체는 눈밭 속에 가려져 있다. 바로 고랭지배추단지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랭지배추 재배를 시도한 곳인데, 시범사업이 성공하자 강원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앞서 방문한 안반데기와 세 번째 목적지인 귀네미마을도 마찬가지로 고랭지배추 재배지이다. 여름에는 푸르디 푸른 배추밭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드넓은 언덕 전체가 새하얀 눈옷으로 갈아입는다.
매봉산과 바람의언덕 주변으로는 최근 슬로우트레일과 숲길 등 새 탐방로가 조성돼 걸어서 오르기에도 좋다. 눈길을 따라가다 보면 노루·멧돼지 등 산짐승 발자국이 이정표가 돼주기도 한다.
매봉산 ‘바람의언덕’. 바람이 들어간 이름답게 풍력발전기 수십 개가 능선을 따라 설치돼 장관을 이룬다.
매봉산 슬로우트레일의 눈길. 왼쪽은 사람 발자국, 오른쪽은 노루 발자국이다.
삼수령에서 백두대간로를 따라 북쪽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마지막 설국인 ‘귀네미마을’이 나타난다. 이정표를 따라 접어든 귀네미길 역시 제설이 돼 있어 마을 입구까지 어렵지 않게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귀네미마을은 1980년대 후반 광동호가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해 터를 잡은 곳이다. 과거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 소개되면서, 한때 전국의 사진 작가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마을 입구서 바라본 상단 전망덱은 높이도 거리도 까마득해 보인다. 마을 표지석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눈길 트레킹에 도전해 본다. 발목 높이는 기본이고, 특정 구간엔 많은 눈이 쌓여 무릎 높이까지 푹푹 다리가 빠진다.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눈이 쌓인 형상도 예사롭지 않다. 바람의 흔적을 따라 자연이 빚은 작품이다.
전망덱에 오르니 언덕 아래 귀네미마을부터 멀리 백두대간 능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눈썰미가 좋다면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바람의언덕도 확인할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눈밭 전체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코스는 4km 정도. 눈길이다 보니 2시간 남짓 소요된다.
눈길 트레킹으로 지친 몸을 채우는 데는 뜨끈한 음식이 제격이다. 소 아홉 마리가 누운 형상이라 이름 붙여진 구와우마을의 간판 없는 식당 ‘구와우 순두부’는 매스컴을 타기 전까진 지역민들만 알던 맛집이다. 당일 아침에 순두부를 만들어 오전 10시 30분 문을 여는데, 준비한 재료가 소진되는 오후 2~3시쯤이면 영업을 마감한다.
하얀 순두부에 양념간장과 꼬마김치를 넣어 한술 뜨면 온몸으로 온기가 퍼진다. 더 구수한 맛을 원한다면 강원도식 강된장인 ‘빡장장’을 넣으면 된다. 하얀 쌀밥에 빡장장을 비벼 먹는 맛도 일품이다.
태백 귀네미마을 전망덱 부근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 아래 마을부터 멀리 뒤쪽으로 백두대간 능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귀네미마을에서 무릎 깊이까지 쌓인 눈길을 만났다.
귀네미마을의 바람이 빚은 기이한 형상의 눈밭.
■부산에서 설국으로 떠나려면…
우리나라 3대 설국은 눈길에 익숙지 않은 부산·경남 사람들에겐 평소 찾기 힘든 여행지다. 그동안 눈꽃 트레킹을 꿈만 꿔 왔다면 올겨울의 끝자락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강원도 태백·정선 눈꽃 트레킹’ 여행 상품이 최근 출시됐다.
트레킹여행전문 승우여행사가 마련한 상품으로, 1박 2일 동안 태백 귀네미마을과 정선 만항재에서 눈꽃 트레킹을 즐기고, 영월 한반도 지형과 선돌, 정선 정암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이달 18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출발하며, 왕복차량과 숙박·식사(3회) 등을 제공한다.
주요 코스인 함백산 만항재(해발 1330m)는 우리나라에서 차량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이다. 정선군 고한읍과 영월군 상동읍을 잇는 고개로, 때가 잘 맞으면 숲 전체에 하얀 꽃이 핀 듯한 ‘상고대’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원근 승우여행사 대표는 “눈을 보기 쉽지 않은 부산을 비롯해 영남지역 분들에겐 최고의 설국을 만날 수 있는 여행지”라며 “눈꽃 트레킹을 체험하고 강원도 토속음식도 맛보면서 제대로 된 겨울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구와우마을의 '구와우순두부'. 빡장장을 더하면 구수하고 뜨끈한 맛이 일품이다.
때가 맞으면 만항재에서 만날 수 있는 '상고대' 절경.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