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아이맥스 3D로 만나본 ‘타이타닉’ 감동…고민거리 던져주는 ‘다음 소희’
영화 ‘타이타닉’과 ‘다음 소희’
‘아바타: 물의 길’(아바타2)로 글로벌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자신의 역작 ‘타이타닉’을 지난 8일 스크린에 되살렸습니다. 전개와 결말을 알고 있었지만, 스크린으로 마주하니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타이타닉과 같은 날 개봉한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칸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돼 호평을 받았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영화였습니다.
선명한 화질로 되살아난 타이타닉, 영화관서 볼 가치 충분해
전 세계 역대 흥행 1위 영화는 ‘아바타’(29억 2000만 달러), 2위는 ‘어벤져스: 엔드 게임’(27억 9000만 달러)입니다. 그 뒤를 이어 ‘타이타닉’(21억 9000만 달러)이 3위를 지키고 있고, 최근 개봉한 ‘아바타2’가 지난 6일 21억 7440만 달러로 4위에 올랐습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억 5000만 달러)는 5위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니까 글로벌 역대 흥행작 톱5에 캐머런 감독의 작품만 3개가 포함된 겁니다.
이런 가운데 타이타닉이 3위 자리를 지키기 위한 묘수를 내놨습니다. 개봉 25주년을 맞아 4K HDR로 리마스터링한 버전이 8일 개봉됐습니다. 3D, 아이맥스 포맷으로도 상영됩니다.
90년대 생인 기자는 DVD나 TV 영화채널을 통해 타이타닉을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극장에서 관람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명작을 영화관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 것 같아 재빨리 아이맥스 3D 포맷을 예매했습니다.
영화는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를 각색한 작품으로, 무려 25년 전인 1997년 개봉했습니다. 타이타닉호에서 우연히 만나 금지된 사랑에 빠진 로즈(케이트 윈슬렛 분)와 잭(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의 이야기를 침몰 사고에 녹여냈습니다.
개봉 당시 전 세계적에서 18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내면서 글로벌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고,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14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11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25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타이타닉은 이전 재개봉작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25년 전 개봉한 영화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화질이 선명해졌습니다.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했던 2017년 버전의 예고편 영상과 비교해보니 차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타이타닉’ 개봉 20주년 재개봉 버전 예고편(위)과 25주년 재개봉 버전 예고편 캡처화면 비교. 파라마운트 픽쳐스, 20세기 스튜디오 유튜브 영상 캡처
큰 화면과 선명한 화질은 감동으로 직결됩니다. 집에서 TV로 볼 때는 조명을 이렇게 훌륭하게 활용한 영화라는걸 미처 몰랐습니다. 잭과 로즈를 비추는 노란 빛의 따스한 햇살, 붉은 빛이 감도는 석양은 아주 서정적인 반면, 침수가 시작된 후 번쩍거리는 실내조명은 공포심을 더합니다. 명암을 강조하는 HDR 기술로 조명의 효과가 극대화 된 것으로 보입니다.
캐머런 감독이 자료 수집에 5년을 들여 철저하게 고증한 타이타닉호의 내·외부 모습도 더 사실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고풍스러운 의상과 화려한 장식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다만 3D 효과가 ‘아바타’처럼 그리 실감나지는 않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캐머런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타이타닉호와 흡사한 크기로 제작된 초대형 모형선을 만들었습니다. 중앙계단 침수 씬도 실제로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부어 만든 장면입니다. 메이킹 필름을 보면 배우들은 물 폭탄을 맞아가며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고, 카메라맨들은 산소통까지 찬 채 이를 촬영했습니다. 이러니 수십 년이 지난 뒤 봐도 리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작품성이야 이미 인정받았으니 별다른 평가를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기승전결을 모두 알고 있는데도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종반부에는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도 꽤 들립니다.
관객 반응도 뜨겁습니다. 개봉 당일인 9일 오전에 찾았던 아이맥스관은 관객으로 가득 찼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9일 관객은 4만 1000여 명(매출액 점유율 29.8%)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이어 2위를 기록했습니다.
CGV 실관람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골든에그’ 지수는 99%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타이타닉을 극장에서 보지 못했던 젊은 관객의 비율이 높다는 겁니다. 20대가 35%로 가장 높고, 10대가 18%, 30대가 23%입니다. 10~30대 관객이 전체 관객의 76%에 달합니다. 기자처럼 스크린으로 타이타닉을 보지 못했던 세대가 새로운 체험을 하려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온라인에서 한 관람객은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못 보고 매번 티비로만 봐서 아쉬웠는데 스크린으로 보니 감동이 2배”라고 호평해 공감을 얻었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다음 소희’는 나타나지 않길
‘다음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 특성화고 학생 소희(김시은 분)의 죽음과 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유진(배두나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16년 전북 전주에서 발생한 실제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성화고 애견미용학과 학생인 소희는 “어렵게 뚫은 대기업”이라는 담임교사의 말에 콜센터 실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평소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성격인 소희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첫 실습부터 고객의 폭언이 쏟아지고, 쾌활하던 고등학생 소희의 눈에는 눈물이 팽 돕니다.
소희가 맡은 ‘방어팀’은 해지·해약을 요구하는 통신사 고객을 회유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애초에 해지하려고 전화했는데 해지를 못하도록 시간을 끄니 짜증 섞인 반응이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욕설을 퍼붓는 안하무인, 성희롱하는 변태까지 상대하면서 소희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녀야 합니다.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일삼는 민원인, 직장 상사와 동료, 특성화고 담임교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고강도 감정 노동의 대가는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월급입니다. 실적이 낮다, 아직 실습생이지 않느냐 등 온갖 핑계를 대더니 약속한 인센티브 지급도 미룹니다.
압박과 책임감에 시달려 일을 그만두지도 못하던 소희는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끊고, 강력계 형사 유진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한국 사회의 썩어빠진 폐단을 목도합니다.
보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줄거리지만, 모두 현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2016년 당시 콜센터에서 일하던 고(故) 홍수현 양은 전주의 한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회사의 위법행위가 적발됐습니다. 수시로 야근을 하던 수현 양은 생전 부모에게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어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실화 바탕의 사회 고발성 영화지만 뻔한 신파를 배제하려 노력했습니다. 2014년 ‘도희야’ 이후 9년 만에 두 번째 장편을 연출한 정주리 감독의 많은 고민이 담겼습니다.
두 주연배우의 호연도 돋보입니다. 배두나는 겉보기엔 차갑지만 심장은 뜨거운 형사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24년 차 배우의 노련함을 보여줬습니다. 감정 변화 폭이 큰 캐릭터인 소희 역을 맡은 김시은도 이번이 첫 장편 데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칩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는 해외에서 먼저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75회 칸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돼 “충격적이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캐나다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선 감독상·아시아 영화 부문 관객상, 도쿄필맥스영화제에선 특별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제12회 암스테르담영화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10여 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지난 8일 국내에서 개봉한 뒤에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모순적인 사회 구조를 잘 꼬집어냈다는 평가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후기가 많습니다.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공분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다음 소희’에는 여러 형태의 하청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도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일어났던 다른 사건들도 떠오릅니다. 영화는 7년 전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데, 엇비슷한 사건들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동료가 숨진 현장에서 곧바로 일하도록 한 제빵공장,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던 코레일 직원이 결국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영화 곳곳에서 기시감이 듭니다.
영화는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도 조명합니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아야 하는데, 그럴수록 더 무시해.” 가상의 인물인 형사 유진의 입에서 나오는 주옥 같은 대사들은 정주리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유진이 수사를 하며 만난 못난 어른들은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합니다.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어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소희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합니다.
영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한국 사회 전체가 콜센터 같습니다. 모두가 실적 싸움과 경쟁에 내몰려 있고, 하청에 하청이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기업도, 학교도, 공공기관도 눈에 보이는 정량 평가와 인센티브에만 목매답니다. 실습생, 비정규직을 등쳐 먹고도 미안한 줄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물론 언론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비정규직의 온상이면서 ‘양질의 일자리’ 운운하며 점잔 빼는 ‘내로남불’의 전형입니다. 한 이름 있는 신문사 소속 직원이 며칠 전 ‘블라인드’에 올린 글을 봤습니다. “뉴미디어 인력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며 “미래가 걱정된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냉소적인 일침인지 자조적인 푸념인지 구분하기 힘든 “일회용 인력”이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다음 소희’는 결코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사실 보고 나면 불쾌해지는 영화입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고, 밥맛도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영화입니다. 영화라기보다는 140분짜리 한국 사회 고발장에 가깝습니다.
공교롭게도 영화 개봉일이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나 봅니다. 영화관에서 나오니 교복 입은 학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꽃다발을 들고 부산 번화가 서면 길거리를 활보합니다. 이 학생들이 안전한 곳에서 마땅한 권리를 보장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마련하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입니다. 더 이상 ‘다음 소희’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언제 그런 세상이 올지는 요원합니다. 영화 개봉 이튿날인 지난 9일,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용균 사망사건’ 원청업체 대표는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용균법’(중대재해처벌법)까지 제정됐는데, 정작 김 씨의 죽음을 막지 못한 사업주에겐 아무런 책임을 묻지 못한 겁니다. 성실한 청년이 일터에서 죽었는데 책임자에게는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배두나는 지난 8일 공개된 <부산일보>와 인터뷰에서 ‘좋은 세상’에 대해 “사람을 우선하는 세상이라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사람을 최우선하고 양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불행한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음 소희’가 없는 세상을 소망이라도 해봅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