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어머니의 잃어버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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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 조교수

여든이 다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온천여행을 다녀왔다. 모녀끼리 한 첫 여행이다. 직장 다니느라 자식 키우느라 늘 종종거리는 생활 덕분에 오십이 다 되도록 어머니와 오붓한 여행 한번 못 갔다니 참 딱할 노릇이다 싶어 만사를 제쳐 놓고 무작정 나선 여행이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숙소에 누워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부터 고집쟁이 아버지 흉보기까지, 끝날 줄 모르는 수다에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그러다 처음 알게 되었다. 어머니도 어릴 적 꿈이 있었다는 것을.

가난한 살림 덕분에 초등학교만 나오신 어머니는 장사꾼이 되는 게 꿈이었단다. 친구들과 길쌈해서 장에 내다 팔며 돈을 모으는 재미로 십대를 보내신 어머니는, 결혼하고도 장사 욕심에 아이 둘을 업고 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셨단다.

그런 어머니가 꿈을 접은 건 출산 때문이었다. 장남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줄줄이 딸을 낳았고 할머니로부터 차라리 밖에서 씨받이를 얻는 게 낫겠다는 모진 말까지 들어야 했다. 무려 딸을 넷이나 둔 뒤에 비로소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그제서야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엄마는 아들이 꼭 낳고 싶었어?” 문득 튀어 나온 내 질문에 어머니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신다. 둘만 낳고 단산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는 시어머니와 남편 등쌀에 애 낳는 기계가 될 수밖에 없었단다.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운동가 마거릿 생어는 출산에 관한 여성의 권리를 이렇게 단 두 마디로 정리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계율 앞에서 낳지 않을 권리를 박탈당했던 어머니의 삶.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최근 정부는 주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연장된 노동시간을 적립해 장기 휴가로 보상받게 하겠단다. 직장인들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코웃음 친다. 지금도 연차를 다 못 쓰는데 장기 휴가가 웬말이란 말인가. 이렇게 노동시간이 길어지면 애는 누가 낳고 누가 돌볼까?

저출생을 걱정하며 정부는 매년 수십조의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출생률은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 독박육아와 경력단절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여자들은 낳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게 낳지 않을 권리의 실천일까? 아니면 낳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일까?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낳지 않을 권리를 박탈당했던 내 어머니의 삶에서 오늘날 여성들은 얼마만큼 멀리 온 것일까. 여자들이 출산의 권리를 온전히 누리면서도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는 언제쯤 가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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