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비극, 남 일 같지 않다”… 부산서도 피해자 속출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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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동래구 20~30대 세입자
중개인 믿고 보증보험 없이 계약
경매 후 하루하루 피 말리는 고통
매물 안내했던 은행 ‘나 몰라라’
전세 피해지원센터 긴급주거시설
전 재산 잃은 터라 임대료 부담도

1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전세 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1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전세 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들어 전세 사기로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가 인천에서만 3명이 나오는 등 전세 사기 피해자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수도권뿐만 아니라 부산에서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속출하지만, 이들을 구제할 방안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피해자들은 속만 태우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부산 동래구 8평짜리 오피스텔에서 홀로 거주하는 이 모(35) 씨는 계획대로라면 현재 결혼 준비로 한창 바빠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신청했던 웨딩박람회도 취소하고 결혼 준비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이 씨는 2월 전세 사기를 당해 전세금 1억 10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이 씨가 거주하는 오피스텔 소유주는 부산진구와 동래구 일대 세입자 등을 상대로 전세 사기를 벌이다 지난 14일 검찰에 넘겨진 30대 임대인 A 씨다. 이 씨는 “피해자 다수가 20~30대 청년이다. 대부분 1억 원 가까이 대출했다”며 “인천 사례가 남의 일 같지 않고 앞길이 막막하다. 빚더미에 앉을 것 같아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고 토로했다.

이 씨는 벼랑 끝에 선 상황이다. 그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은 총 33세대 규모다. 전세금은 1억 원에서 1억 1000만 원 수준이며 공동담보로 53억 원 정도의 근저당권이 설정됐다. 공인중개사가 근저당은 건물 시세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고 안심시켜 전세보증보험 없이 계약을 진행했다. 이 오피스텔에는 2월 채권자의 신청을 받은 법원에 의해 임의경매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이 씨를 비롯한 피해자는 소액의 최우선 변제금을 받거나,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면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날지도 모른다. 권리관계에서 근저당권이 임차인의 보증금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최근 인천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 3명이 잇따라 숨진 가운데 18일 오전 인천시 미추홀구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아파트 창문에 피해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최근 인천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 3명이 잇따라 숨진 가운데 18일 오전 인천시 미추홀구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아파트 창문에 피해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이 씨는 “후순위 세입자여서 전세금 대부분을 받지 못할 것 같다”며 “임의경매 개시 결정이 내려지자 갑자기 오피스텔에 건장한 남성들이 주둔해 세입자들이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피해자에게는 매일이 고통”이라고 말했다.

동래구에 거주하는 또 다른 전세 사기 피해자 김 모(29) 씨는 생애 첫 전세에서 사기를 당했다. 사회 초년생인 김 씨는 9000만 원가량을 대출했는데 후순위 세입자여서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그는 “은행에서 안내를 받을 때 매물에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며 “어디든 문을 두드리지만 아무 데도 손을 내미는 곳이 없어 막막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전세 사기 수법이 다양해지고 교묘해져 피해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젊은 층이 주로 거주하는 빌라나 오피스텔은 적정 시세를 알기 어려워 전세 사기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전세 사기 수법은 무자본 갭투자다. 미분양 주택 등을 임차인의 전세 보증금으로 매입한 뒤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방법이다. 또 이른바 ‘바지 매수인’을 모집해 주택 명의를 이전한 뒤 집값이 전세금보다 싼 ‘깡통 전세’ 수법으로 보증금을 가로채는 수법도 있다. 임대인, 중개인, 부동산 컨설팅 업체 등이 함께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전세 사기라는 걸 알아채기 어려운 실정이다.

전세 사기가 끊이지 않지만 이로 인한 책임은 피해자들이 감당하는 상황이다. 정부가 내놓는 대책의 초점은 대체로 사기 예방에 맞춰져 있다. 전세 사기 피해자를 위한 긴급 거처의 실효성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부산에도 전세 피해지원센터가 생겼고 긴급주거시설을 지원하지만 전세 사기 피해 확인서를 발급 받아야 하는 등 기준이 까다롭다. 긴급주거시설의 월 임대료는 주변 시세의 30% 수준이지만, 전 재산을 잃은 이들에게는 이조차도 부담이다.

동의대 강정규 부동산대학원장은 "공인중개사들의 사전 설명에 대한 책임 강화 등 전세 사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며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책도 빠르게 마련해 이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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