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외지에서 찾는 가족애…‘라이스보이 슬립스’와 ‘65’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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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65’. 판씨네마·소니픽쳐스코리아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65’. 판씨네마·소니픽쳐스코리아 제공

“한국에서 곧 개봉합니다. 극장에 와서 많이 봐주세요.”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앤서니 심 감독이 지난해 10월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남긴 말입니다. 심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지난 19일 정식 개봉해 한국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한국계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BIFF 당시 ‘제2의 미나리’로 불리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기자도 시사회 이후 심 감독과 배우들의 팬이 됐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알아두면 좋을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소개합니다.

기자가 BIFF를 계기로 응원하게 된 배우가 또 있는데, 바로 애덤 드라이버입니다. 2021년 BIFF에서 상영된 후 곧바로 개봉한 영화 ‘아네트’에서 그가 보여준 이중적인 아빠 ‘헨리’ 연기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애덤 드라이버가 주연을 맡은 영화 ‘65’가 지난 20일 개봉해 관람했습니다.


‘제2의 미나리’?…‘라이스보이 슬립스’ 매력은 독자적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 캐나다로 이주한 한국인 홀어머니 ‘소영’(최승윤 분)과 아들 ‘동현’(에단 황)이 겪는 성장통을 다룹니다.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인 앤서니 심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최근 공개된 영화 예고편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대목은 아마 어린 동현(노엘 황)이 엄마가 싸준 김밥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일 겁니다. 캐나다 초등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생소한 음식인 김밥을 먹는다는 이유로 동현을 ‘라이스보이’라고 부르고 따돌립니다. 동현은 엄마 소영에게 김밥이 아닌 다른 음식을 싸달라고 조심스레 부탁합니다. 소영은 ‘누가 널 놀리면 맞서 싸우라’고 하지만, 동현이 실제로 싸운 대가는 학교로부터의 징계입니다. 인종차별·학교폭력 가해자인 또래 캐나다 학생들은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소영도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남성 백인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해 공개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아들에게 ‘즉시 맞서라’고 한 소영답게 당당하게 대처한 겁니다. 하지만 항의하기 전 잠시 망설이는 소영의 모습에서 당시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민자 가정의 고충을 다룬 이 영화는 ‘제2의 미나리’라고 불렸지만, 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차별점이 뚜렷합니다. 서울 출생인 심 감독은 8살이던 1990년대 초 부모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심 감독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해 BIFF서 만난 심 감독은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동현이라는 캐릭터에 투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팀. 왼쪽부터 배우 에단 황, 앤서니 심 감독, 배우 최승윤. 부산일보 DB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팀. 왼쪽부터 배우 에단 황, 앤서니 심 감독, 배우 최승윤. 부산일보 DB

심 감독은 고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는 과정에서 ‘장편영화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고, 2019년 ‘도터’를 통해 그 꿈을 이뤘습니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심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심 감독은 많은 투자를 받고 ‘라이스보이 슬립스’ 제작에 돌입했지만 비슷한 이야기인 ‘미나리’(2021)의 등장에 당황했습니다. 그는 “시나리오 작업 중 ‘미나리’가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며 “잠시 패닉이 왔다. ‘너무 비슷하면 망하는데’ 하고 걱정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영화를 직접 본 심 감독은 겹치는 부분이 많지 않아 안심했다고 합니다. 사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미나리’가 아니라 ‘박하사탕’(2000)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게 심 감독의 설명입니다.

영화에서 소영과 동현은 서로를 의지하며 어찌저찌 잘 지내지만, 새 가족이 되고 싶어하는 소영의 직장 동료 사이먼(앤서니 심)의 개입이 모자 간 불화를 일으킵니다. 동현과 삐걱거리던 소영은 몸까지 아파지자 아들과 함께 고향인 한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가족애, 이민자가 당하는 차별, 출신과 현실의 괴리로 겪는 정체성 혼란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냈습니다. 소영과 동현이 강원도를 찾은 시퀀스는 16mm 필름 카메라로 담아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따스한 촬영 현장 분위기도 이러한 연출에 한몫 했습니다. 강원도 현장에서 수준급 셰프인 심 감독의 친척들이 배우와 제작진에게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최승윤 배우는 “집밥을 먹으며 촬영하니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촬영할 맛이 나더라”면서 “영화 촬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판씨네마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판씨네마 제공

무용가 출신인 최승윤은 이번 작품이 장편영화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하고 세심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신인 배우 최승윤이 주연으로 캐스팅 된 과정은 드라마틱했습니다. 심 감독은 오디션을 여러 차례 진행하고도 소영 역에 맞는 배우를 찾지 못했습니다. 작품 연출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의 캐스팅 감독이 “괜찮을 것 같은 배우가 딱 한 명 있다. 이 배우는 특별한 게 있다”며 추천한 배우가 최승윤이었습니다. 최승윤이 연기하는 영상을 보자마자 “완벽하다”고 생각한 심 감독은 즉시 만남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오디션을 봤는데 매번 이 사람(최승윤)과 이 역할(소영)은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최승윤은 ‘연기 비결’을 묻는 말에는 “따로 전문 교육을 받지는 않아 연기 테크닉은 없다”면서도 “심 감독과 함께 연습과 리허설을 반복했다. 또 ‘동현’ 역 배우들과 실제로 시간을 보내며 친밀감을 형성했고, 이들을 아끼는 마음을 연기에 녹여냈다”고 답했습니다.

동현을 연기한 에단 황도 우여곡절 끝에 캐스팅했습니다. 애초에 북미에서 활동하는 어린 한국 배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겨우 섭외한 배우가 에단이었는데, 심 감독은 이번엔 사진을 보자마자 “얘가 동현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한인 이민자 2세인 에단은 동현이라는 캐릭터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에단 역시 주연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심 감독의 트레이닝 덕에 호연을 펼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배우 출신인 심 감독은 소영의 직장 동료인 ‘사이먼’을 연기했습니다. 심 감독은 “원래 내 작품에 배우로 등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원래 사이먼이 인도 남자였다. 대사도 미리 다 썼다”면서 “그런데 이야기에 잘 맞지 않는 설정인 것 같아 결국 한국 입양아 캐릭터로 바꿔 연기도 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심 감독은 “자라면서 본 영화에 나처럼 생긴 주인공은 별로 없었다. 있어도 쿵푸 영화였다”며 “한인 이민자 1세대의 노력 덕에 우리 세대부터는 영화 감독이라는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나도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섬세한 연출과 짜임새 있는 각본, 신인 배우들의 명연기로 완성한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북미에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플랫폼상을 받은데 이어, 지난달 10일에는 토론토영화비평가협회(TFCA)가 선정한 ‘2022 최고의 캐나다 영화’에 올랐습니다.


영화 ‘65’. 소니픽쳐스코리아 제공 영화 ‘65’. 소니픽쳐스코리아 제공

공룡 SF영화 ‘65’, 킬링타임으론 나쁘지 않지만…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65’는 6500만년 전 다른 행성에 살고 있던 ‘외계 인간’ 밀스(애덤 드라이버)가 공룡이 지배하는 지구에 불시착하며 벌어진 이야기를 다룹니다.

비상착륙한 우주선에서 생존한 사람은 조종사인 밀스와 승객 ‘코아’(아리나 그린블랫)뿐입니다. 불시착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탈출선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곳곳엔 포악한 육식공룡이 득시글거리고, 그 포악한 공룡들을 멸종시킨 소행성이 지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밀스는 총 한 자루를 쥐고 딸과 비슷한 나이의 소녀 코아와 함께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합니다.

줄거리에서 유추할 수 있듯, ‘65’는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SF 액션 영화입니다. 설정이나 소재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특히 공룡 영화는 매니아층이 있어 적당한 완성도를 갖췄다면 호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계적 흥행작인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각본을 쓴 스콧 벡과 브라이언 우즈가 감독을 맡은 점도 기대감을 모은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평가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스토리가 진부하다’, ‘공룡이 등장하는 씬이 별로 없다’, ‘이렇다 할 임팩트가 없다’ 등 혹평이 꽤 많습니다.

기자도 이러한 비평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65’는 공룡 영화인데도 공룡이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쥬라기공원’처럼 다양한 공룡이 등장할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65’에선 ‘트리케라톱스‘처럼 뿔이 난 각룡류나 ‘브라키오사우르스’처럼 목이 긴 용각류 등 초식공룡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크고 작은 육식공룡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나름 긴장감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CG로 만든 공룡의 퀄리티도 제법 좋습니다. 기자는 ‘4DX’ 포맷으로 감상했는데, 몰입감을 더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출이 훌륭한 편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극 중 밀스와 코아는 공룡이나 지형지물 때문에 위기를 겪는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객에게 순도 높은 긴장감을 선사하지는 못합니다. 공룡의 눈을 피해 바위 뒤에 숨은 채 코아의 입을 틀어막는 밀스, ‘벨로시랩터’처럼 작은 육식동물에게 쫓기는 코아…‘쥬라기공원’ 같은 공룡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겐 기시감이 들 법한 장면들입니다. 애초에 괴수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어른이 아이를 필사적으로 보호한다는 설정 자체가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와 다를 바 없기도 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영화의 등장인물 두 명은 수준급 연기를 선보입니다. 마초이즘적 매력을 자랑하는 배우 애덤 드라이버가 보여주는 애절한 부성애는 호소력이 짙습니다. ‘코아’를 지키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코아 역의 아역 배우 아리나 그리블랫의 연기도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두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려는 ‘가족애’라는 메시지는 연출의 한계 탓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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