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영화제? 미쳤다고 했죠" BIFF 전 이사장 김동호 [부산피디아 WHO(後)]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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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대외 활동에 목을 맸다. 빈곤한 자기소개서를 채우기 위해 공모전, 인턴 등 많은 일(?)에 도전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부산국제영화제(BIFF) 자원봉사다.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 열리는 영화 축제. 스크린에서만 보던 배우들이 개막식 레드카펫을 장식하고 영화의전당은 화려한 조명으로 밤늦게까지 빛났다. 특히 감독과 배우 그리고 관객이 영화를 두고 허물없이 토론하는 GV의 열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BIFF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걸까? 왜 부산에서 열리게 된 걸까? 누가 만들었을까? 이 물음에 답해줄 유일한 사람을 만나고 왔다. 영화인의 스타 김동호(86)다. BIFF 초대 집행위원장이자 민간 조직위원장, 현재는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인 그를 자택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낙하산이었던 영화인의 스타

김동호 전 이사장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극장에 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1961년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라고 할 수 있는 문화공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1988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이 될 때까지도 영화와는 거리가 먼 공직자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1973년 창설됐고, 첫 해 사장만 극장을 운영하시던 분이 맡았고, 그 뒤로는 쭉 외부인이 내려왔습니다. 낙하산이었죠. 그렇다 보니 제가 사장으로 갔을 때도 반감이 컸죠. 당시 영화감독협회 회장 명의로 반대 성명까지 붙었습니다. 당장 사표를 내라는 거였죠. 그럴수록 오히려 나 스스로 영화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국내로 수입된 영화, 중요한 외화를 섭렵했고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이가 무색하게 또렷한 목소리와 정돈된 몸짓. 정갈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고집스러운 눈빛이 빛났다.


BIFF는 1996년 첫 회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27번의 축제를 열었다. 현재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과거엔 우려가 컸다. BIFF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걸까?

"문화의 불모지인 부산에서 영화제를 연다는 게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반대가 클수록 오기가 더 생기는 편이죠. 영진위 사장 시절 모스크바, 몬트리올 영화제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자국의 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는 영화제가 최고의 방법이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1995년 8월 18일 부산에서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오석근 등이 찾아와 BIFF의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 간청했고 받아들였죠."

프랑스 칸, 스페인 산세바스찬 등 세계적인 영화제를 개최하는 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김 이사장은 "바다와 영화라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부산에도 존재해 영화제 개최지로 안성맞춤"이라며 "부산이라면 전 세계 영화인들의 관심을 끌만했다"고 덧붙였다.


젊은 영화인들의 열기와 김 이사장의 뚝심으로 BIFF를 열기로 했지만, 중요한 것은 예산이었다. 첫 회 예산으로 22억 원 정도를 책정했다. 부산시에서 적극 지원해 준다고 했지만 3억 원에 그쳤다. 입장료 수익을 제외한 15억 원 정도를 협찬받아야 하는 상황.

"같이 BIFF를 만들자고 한 분들이 교수들이라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했어요. 제가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죠. 고등학교 동기였던 대우 김우중 회장의 부인 정희자 대우개발회장을 찾아가 지원을 약속받았고, 당시 서울 극장연합회 회장이었던 곽정환 회장, 정윤희 배우의 남편이자 고등학교 후배인 조규영 중앙건설 회장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서울시 극장연합회 곽정환 회장의 부인 고은하 배우의 이름으로 협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부족해 당시 문정수 부산시장에게 펀드레이징 디너파티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 전 이사장은 "부산의 기업인 100명 만 파라다이스 호텔에 모아 달라고 요청한 후 임권택 감독, 남궁원, 강수연 등 배우를 초청해 테이블마다 앉히고 협찬을 유도하게 했다"며 "저녁값만 없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다행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 BIFF의 상징을 만들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영화계와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 남포동 5개 개봉관, 수영만요트경기장에 있던 야외 상영장은 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연일 초만원을 이뤘다. 31개국 169편이 상영된 1회 영화제는 해외 영화제 수상작은 물론 단편 영화들까지 거의 매진됐다. 10만 명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총 관람객 수는 18만 4071명. 훨씬 뛰어 넘었다. 낮에는 남포동에서 영화를 보게 하고, 저녁에는 유람선을 타고 수영만 야외상영장으로 관람객을 유도했다. 바다를 낀 부산의 낭만을 활용한 셈이다. 영화제 개최지로 부산을 선택한 김동호 전 이사장의 혜안이 적중했다.

"사실 남포동으로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올 것인가에 대해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관객을 더 모을까 고민하다 야외 상영으로 유명한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스위스의 한 영화 장비 임대 업체에서 6층 높이의 대형 스크린을 배로 옮겨와 수영만 야외상영장에 설치해 영화를 상영했는데, BIFF의 명물이 됐습니다."


현재 BIFF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의전당'도 김동호 전 이사장의 큰 그림이다. 당시 BIFF는 '음력영화제'라는 별명이 있었다. 음력으로 지내는 추석 명절을 피해 영화제를 개최하려다 보니 붙은 별명이었다. 극장은 추석이 대목인데 영화제 출품작을 극장에 걸면 흥행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1회는 9월에, 그 뒤 네 번은 10월에 개최했다. 추석이 10월이었던 6회와 7회는 쌀쌀한 11월 중순에 열려 야외 상영을 할 수 없었다.

"일정이 겹치게 된 후쿠오카나 밴쿠버영화제의 집행위원장들에게 사과하기에 바빴습니다. 영화제 출품작도 겹치기 일쑤였죠. 무엇보다 영화제 전용 극장 건립이 시급했습니다. 2002년 당시 대선 주자들에게 전용관 건립을 공약에 포함하도록 설득했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부산의 랜드마크가 될 건물을 짓는 게 목표로 공제 공모를 통해 설계를 확정하고, 예산을 얻어 2011년 완공됐습니다."



■ 몸 바쳐 키운 BIFF

초창기 BIFF가 성공한 배경에는 김동호 전 이사장의 '열정'이 필수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영화제가 시작되면 김동호 전 이사장은 동분서주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부산을 동서로 가로질러 다녔다. 1998년 제3회 영화제, 지금은 세계적인 감독이지만 당시엔 무명인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의 '소무'가 BIFF의 대표 경쟁 부문인 뉴커런츠에 초청되어 오후 9시 남포동 부산극장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1시간 뒤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에서 프랑스 대사가 주최하는 프랑스 영화의 밤 행사가 열리게 된 것. 부산의 도로 사정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참석하는 게 맞지만 김 전 이사장이 택한 것은 택배 오토바이다.

"핵심 분야인 뉴커런츠에 초청된 감독을 집행위원장이 맞이하고 소개하는 건 감독에 대한 예의이자, 관객에 대한 예의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영화의 밤도 빠질 순 없었죠.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택배 오토바이였고 바로 택배회사에 연락해서 짐 대신 나를 운반해달라고 요청했죠. 정장에 헬멧을 쓰고 자전거보다 조금 큰 오토바이에 실려 다녔습니다. 시간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죠. 터널이고 때로는 인도로 달려 겨우 시간을 맞췄습니다. 위험하다고 말리는 직원들도 많았죠."

김 이사장은 영화제의 주 무대가 해운대로 옮겨질 때까지 5년 정도 택배 오토바이를 이용했다.


위험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건강'도 비프를 위해 바쳤다. 한때 김 이사장은 '술'로 유명했다. 과거 해운대해수욕장엔 포장마차가 유명했다. 조선비치호텔부터 미포까지 줄을 이었다. BIFF가 시작되면 포장마차는 영화 촬영 현장을 방불케 했다. 곳곳에 배우와 감독, 해외 영화계 인사로 꽉 찼다.

"영화제 시기 하루 일정이 끝나면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한 곳도 빠지지 않고 포장마차를 방문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거기서 얻은 정보나 아이디어들이 영화제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았죠. 소주를 한 잔씩 주고받고 하는데, 그러다 보면 100~150잔 정도 마시는 거죠. 한 10여 년을 그렇게 살다가, 2002년 1월 1일 딱 끊었습니다. 10년 정도 그렇게(?) 기반을 닦아 놓으니, 더 이상 BIFF를 술로 성공시킬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죠. 마실 만큼 마신 셈이죠. 허허"



■ 위기를 겪고 '기생충' 키우다

승승장구하던 BIFF. 한 번의 고비를 맞는다. 세월호 사건을 다룬 영화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부산시와 부산국제영화제 측이 대립하게 된 것. 서병수 당시 부산시장이 정치적 중립성을 문제 삼아 상영 취소를 요청했으나 BIFF는 영화를 상영했고 당시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부산시가 해촉하면서 많은 영화인 단체가 BIFF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전 명예집행위원장으로 일선에선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서병수 시장이 조직위원장을 민간에게 넘기겠다고 발표한 후 제가 오게 됐는데, 무엇보다 보이콧한 여러 단체를 설득해 영화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했죠. 영화제는 좋은 영화로 말할 뿐 정치색으로 물드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BIFF는 초창기부터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을 지향한 영화제입니다. 2회 영화제에 김대중 당시 야당 후보가 개막식에 왔지만,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2019년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발생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최고의 작품에 주어지는 황금종려상을 받게 된 것. 이듬해 기생충은 '백인들의 잔치'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하며,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96년부터 칸 영화제를 방문하며 누구보다 한국 영화의 수상을 기대했던 김 이사장. 그는 기생충의 성공은 BIFF 덕이라고 말했다.

"코로나 기간을 빼더라도 23번 칸을 다녀왔습니다. 1997년 칸영화제가 50주년을 맞이할 동안 한국 영화는 1984년 이두영 감독의 <물레야물레야>를 비롯해 5편만 소개됐죠. 그러다 BIFF 개막 이후 선정위원들이 오가기 시작하자 다음 해인 1998년,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을 비롯해 4편이나 소개됐습니다."

50년 동안 5편만 소개되던 한국 영화가 불과 1년 만에 위상이 달라진 것. 그는 "그러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경쟁 부문에 올랐고, 2002년 <취화선>이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을, 2007년 배우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죠. 그리고 드디어 2019년,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게 됩니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 그 시작은 BIFF입니다."



■BIFF, 더 가까워져라

올해로 28회째를 맞는 BIFF,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뚫고 이제는 전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할 때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외연을 키우기보다 영화제 본래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주문했다.

"영화제의 목적은 자국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탈리아 동북부 도시 우디네에서 열리는 극동영화제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특징으로 아시아 영화들의 유럽 진출 교두보 같은 곳이죠. 상영관도 많아야 두 곳입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전세계 영화인들과 시민들이 격의 없이 이야기 나누고 친해질 수 있는 곳이죠. 영화인과 시민 모두 우디네 영화제에 가고 싶어 하는데 BIFF도 가고 싶은 영화제, 초대받고 싶은 영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26회에 신설된 프로그램인 동네방네 비프는 남포동과 해운대를 중심으로 개최한 영화제를 부산 전역으로 펼쳤다. 총 17곳에 스크린을 설치해 도시 전체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추천작 상영, 게스트와의 만남 등을 통해 지역 주민에게 호평을 받았다. 김동호 이사장이 언급한 방향으로 BIFF는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김 이사장에게 BIFF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돌아다니는 것,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며 "BIFF 덕분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고, 많은 친구를 사귀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인생의 후반전을 함께한 반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형욱·이상배 기자 thoth@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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