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온돌과 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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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오래전 먼 나라의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빈대떡을 안주로 해서 맥주를 마시다가 친구가 말했다. “바닥이 따뜻해서 너무 좋다. 이게 온돌이라는 거지?” “응. 전통 온돌은 아니지만, 일종의 온돌이지. 보일러라고 해.” 그걸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어쩐지 뿌듯했다. 친구가 다시 물었다. “이 정도 집을 렌트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들어?” 나는 월세와 전세 두 가지 방법이 있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월세는 매달 돈을 내는 방식이고, 전세는 월 임대료가 없는 대신 처음에 많은 보증금을 내는 거라고. 그럼 그 보증금이 매달 차감되는 거냐고 묻기에 그렇지 않다고,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갈 때 그대로 돌려받는다고 말했더니 친구는 눈이 동그래졌다. “집을 공짜로 빌려준다고? 왜? 집주인은 왜 그렇게 해주는 건데? 본인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야?” 전세 제도에 대해 처음 듣는 그 친구는 무척 신기해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때 나는 갭 투자라든지 전세 대출이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웃고 말았다. 친구는 한국이 너무 좋다고 했다. 방바닥은 따뜻하고, 집주인들은 공짜로 집을 빌려주는 나라. 그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전세 제도, 너무 좋은 것 같아, 라고.

이십 대 중반, 학업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혼자 살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목돈이 없었으므로 월셋집을 구해서 살았다. 그리 비싼 곳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월급에서 다달이 빠져나가는 월세가 너무 아까웠다. 전세였다면 매달 허무하게 나가버리는 그 돈을 다 모을 수 있을 텐데, 싶었던 것이다. 오직 한국에만 있다는 그 좋은 전세 제도를 사회 초년생인 내가 활용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곪은 종기가 터지듯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전세 사기 사건들. 절망과 암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등진 피해자들의 기사를 읽을 때면,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 전셋집을 구할 수 있기를 꿈꾸던 이십 대의 내 얼굴이 겹쳐진다. 피해자는 나였을 수도, 내 친구이거나 나의 가족이었을 수도 있다.

나도 최근에 전세금을 제 날짜에 돌려받지 못해 전전긍긍한 일이 있었다. 집주인은 빌라왕도 건축왕도 아니며 그저 집 두 채를 가진 흔한 임대인이었고,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면 바로 내게 돈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입자는 구해지지 않았고 임대인은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난감했고 불안했다. 그리고 문득 그 상황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쩌자고 자산이나 부채가 검증되지도 않은 개인에게 집값의 80퍼센트가 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맡겼는가. 집이 두 채인 임대인은 왜 세입자에게 돌려줄 돈이 없는가. 왜 사람들은 타인의 돈을 빌려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는가. 우리에게 대체 집이란 무엇인가.

며칠 전에는 내가 지금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이 갑자기 바뀐 일도 있었다. 집을 보러 왔던 사람은 1분 만에 대충 슥 훑어보더니 바로 집을 사버렸다. 나는 만 원짜리 티셔츠 하나를 살 때에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한참을 고민하는데, 결단의 스케일이 다르구나 싶었다. 갭 투자란 원래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과, 이번 집에서 나갈 때는 전세금을 제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법과 제도에는 여전히 구멍이 많고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세력은 어디에나 있다. 그 속에서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이들은 절망하다가 끝내 모든 걸 포기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좋은 시작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무한한 탐욕에 잠식되어버린 것들…. 먼 나라의 그 친구를 재회하면 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온돌은 여전히 좋지만 전세는 말이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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