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범죄 피해자와 일상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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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부산서 범죄 피해자 애프터케어 논의
보호와 회복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
헌법은 범죄자 인권 유린에만 초점

세계 각국 트라우마 치유 관심 높아져
불안과 공포에 대한 사회적 공감 필요
일상 회복과 사회적 연결 국가의 책임

최근 부산시의회와 부산시가 전국 최초로 범죄 피해자 ‘애프터케어’ 체계를 구축하는 논의 자리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산시의회 서지연 의원이 주최한 ‘범죄 피해자 애프터케어 토론회’에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어 현행 범죄 피해자 지원 체계의 실효성 문제를 지적했다. 부산시도 여성권익증진국을 중심으로 범죄 피해자의 회복적 지원 방향에 공감하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범죄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집중하는 사법 체계 마련을 촉구하는 〈부산일보〉의 ‘제3자가 된 피해자’ 기획보도에 이어 부산시의회와 부산시의 적극적인 행보가 반갑다.

피해자 보호와 회복을 위한 길은 늦은 걸음으로 이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원 내 판사 연구모임인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에 따르면 근대 헌법은 주로 국가권력에 의해 범죄자의 인권이 유린되고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 범죄 피해자 보호 논의는 범죄자의 보호 논의보다 늦게 이루어졌는데, 당초에는 범죄자 처벌이라는 결과로 피해자는 충분히 보호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피해자 보호 논의가 세계 각국에서 활발한 것은 처벌의 결과만으로 피해자 보호가 충분치 않다는 인식이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여전히 무수한 시행착오가 존재한다. 범죄 피해 당사자임에도 사건과 재판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범죄 피해자임에도 피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무고로 몰아가는 사례도 있다. 성폭력 피해의 경우 용기 내어 신고하더라도 진술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피해자다움을 문제시하면서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진짜 미투’ ‘가짜 미투’를 구분하며 피해자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여론을 형성하여 피해자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피해자 보호지원제도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주체들의 인식이 성숙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부산시의회 방청을 해 보면 일부 시의원 역시 아직까지 사회적 인식이 낮은 성범죄나 여성폭력에 있어서는 오히려 예산 삭감을 주장하거나 그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넷플릭스에 방영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드라마가 있다. 2008~2011년에 걸쳐 벌어진 미국 워싱턴주와 콜로라도주 연쇄 강간 사건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 사건을 탐사보도한 기자들의 르포가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판된 바 있다. 피해자인 18세의 마리는 자신의 방에 침입한 괴한에 의해 강간 피해를 입고 즉시 경찰에 신고했으나 오히려 허위 신고죄로 기소되어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과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한 서로 다른 경찰관들에 의해 마리는 수없이 반복되는 진술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답지 않은 태도나 사소한 부분을 제대로 진술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사는 중단되고 오히려 허위 신고를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까지 받게 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워싱턴주와 콜로라도주를 돌아다니며 연쇄 강간을 저지른 남성이 검거되었고, 마리의 진술이 사실로 드러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는 사회가 어떤 끔찍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다.

‘56년 만의 미투’로 알려진 최말자 씨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보호받아야 할 성폭행 피해자가 오히려 남성의 혀를 절단한 가해자로 취급받아 성폭행범보다 더 형량이 높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18세 소녀는 70대 노인이 되어 국가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2020년 재심을 청구했다. 부산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오늘날과 같이 성별 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 가치로 받아들여졌다면 청구인인 피해자를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시대적 착오임을 인정했으나 1, 2심 판결에서 재심 요청을 기각했다. 대법원은 2년째 재심 개시 여부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인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와 회복을 다룬 그의 저서에서 회복의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전의 확립, 기억과 애도, 연결의 복구. 폭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안전의 확립이 최우선이며, 트라우마의 경험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그로 인한 상실을 충분히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일상을 다시 회복하고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피해자의 신고는 첫 단계이며, 회복에 이르는 과정은 길고 긴 마라톤과도 같다. 수사기관의 밝은 눈과 국가와 사회의 제도적 뒷받침, 피해 생존자를 대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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