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도 인정한 ‘한국의 서원’, 어떤 가르침이 스몄을까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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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의 시초가 된 ‘도산서당’과 마당 앞 연못(정우당). 퇴계 이황은 만년에 이 서당을 지어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산서원의 시초가 된 ‘도산서당’과 마당 앞 연못(정우당). 퇴계 이황은 만년에 이 서당을 지어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인 2019년 여름, 우리나라엔 큰 경사가 있었다. ‘한국의 서원’이 국내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유림들이 세운 교육기관 정도로만 알았던 서원이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은 순간이다.

서원 하면 대개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리지만, 맏이는 건립연대가 가장 빠른 경북 영주 ‘소수서원’(1543)이다. 이와 함께 경남 함양 ‘남계서원’(1552), 경북 경주 ‘옥산서원’(1572), 경북 안동 ‘도산서원’(1574)과 ‘병산서원’(1613), 전남 장성 ‘필암서원’(1590), 대구 달성 ‘도동서원’(1605), 전북 정읍 ‘무성서원’(1615), 충남 논산 ‘돈암서원’(1634) 등 9곳이 세계유산목록에 올랐다.

4년이 흘러 코로나 빗장이 풀린 지금, 뒤늦게나마 서원의 가치를 찾아나섰다. 건립연대 순으로 소수·남계·옥산·도산서원을 방문했다. 하나같이 자연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이들 서원은 오랜 역사만큼 넓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서원의 역사가 시작된 '소수서원'의 입구. 오른쪽에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경렴정이 보인다. 한국 서원의 역사가 시작된 '소수서원'의 입구. 오른쪽에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경렴정이 보인다.
소수서원 강학당 처마에 걸린 '백운동' 현판. 소수서원 강학당 처마에 걸린 '백운동' 현판.

■ 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이 있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일대는 선비문화를 알리는 각종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매표소부터 소수서원 입구까지 100여m는 울창한 솔밭이다. 때마침 정문(지도문) 안 강학당에서 경전을 읽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강학당 처마에 내걸린 현판엔 소수서원의 옛 이름 ‘白雲洞(백운동)’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사당과 함께 백운동서원(1543)을 건립한 것이 시초다. 이어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청원으로 1550년 명종이 소수서원이란 친필 현판을 하사하며 최초 ‘사액서원’이 됐다. 요즘으로 치면 첫 국가공인 사립대학인 셈이다.

소수서원 마당에 놓인 '관세대'(앞)와 '정료대'(뒤). 유생들은 제를 올리기 전 관세대에 대야를 놓고 손을 씻었다. 정료대는 위에 불을 밝혀 지금의 조명시설처럼 사용했다. 소수서원 마당에 놓인 '관세대'(앞)와 '정료대'(뒤). 유생들은 제를 올리기 전 관세대에 대야를 놓고 손을 씻었다. 정료대는 위에 불을 밝혀 지금의 조명시설처럼 사용했다.

무릇 공부란 글을 통한 배움이 다가 아니듯, 서원의 궁극적인 목적도 성인(聖人)을 길러 내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서원의 내부도 학문을 닦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신위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제향 공간’, 유생들이 휴식하며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나뉜다.

소수서원 역시 공간적 구분은 있지만, 유생들의 기숙사나 장서각(도서관) 등 주요 건물의 배치는 자유롭다. 마당 곳곳에 놓인 정료대(조명시설), 관세대(대야 받침대), 일영대(해시계) 등의 유물을 통해 당시 유생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유식 공간인 경렴정과 취한대는 담장 밖에 있다. 이들 정자는 죽계천을 사이로 서로에게 그림이 되어 준다.

인근 소수박물관에선 안향 초상을 비롯해 여러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는데, 리모델링 공사로 아쉽게도 연말까지 휴관이다. 대신 별관에서 ‘현판’을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남계서원 홍살문 너머로 대문 격인 풍영루가 보인다. 남계서원 홍살문 너머로 대문 격인 풍영루가 보인다.
남계서원 강당 뒤편의 사당에 가려면 층층 계단 수십 개를 올라야 한다. 남계서원 강당 뒤편의 사당에 가려면 층층 계단 수십 개를 올라야 한다.

■ 함양 남계서원

조선시대 세 번째(남한에선 두 번째)로 건립된 남계서원은 이름처럼 경남 함양군 수동면을 따라 흐르는 ‘남계(남강의 옛 이름)’ 곁에 들어섰다. 홍살문을 지나면 대문격인 2층 누각(풍영루)이 웅장한 모습으로 맞이한다. 누각 위에 오르면 앞쪽으로 탁 트인 들판과 지리산자락, 뒤편으로 서원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계서원은 강학·제향·유식 공간이란 한국 서원의 기본 구조를 정착시켰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강당(명성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이 생활하며 공부하는 동재·서재,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한다.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인데, 이후 건립된 서원은 대부분 같은 형식을 따랐다.

남계서원 사당 앞에서 내려다 본 전경. 들판과 남강, 더 멀리 겹겹이 산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계서원 사당 앞에서 내려다 본 전경. 들판과 남강, 더 멀리 겹겹이 산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부터 함양은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특히 조선조 5현 가운데 하나인 일두 정여창은 ‘우함양’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선생을 모신 사당은 명성당 뒤쪽 한참 높은 경사지에 위치한다. 가파른 층층계단 수십 개를 올라야 비로소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만날 수 있다.

사당 입구 내삼문에서 굽어보는 풍광은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들판과 남강 너머로 겹겹이 포개진 봉우리의 자태는 자연의 이치와 호연지기를 일깨운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1605년 정여창 선생의 생가 주변에 복원됐고, 1612년 옛터인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선생의 기운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인근 하동 정씨 집성촌인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고택’에 들러보길 권한다.

옥산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 하마비에서 말을 내려 징검다리를 건너면 옥산서원의 정문에 이른다. 옥산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 하마비에서 말을 내려 징검다리를 건너면 옥산서원의 정문에 이른다.
옥산서원의 강학 공간인 구인당과 동재·서재. 옥산서원의 강학 공간인 구인당과 동재·서재.

■ 경주 옥산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주차장에서 정문(역락문)까지 오솔길로 이어지는데, 길 바로 옆을 따라 흐르는 자계 물소리에 걷는 동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정문으로 들어서기 전 자계천 한가운데 있는 너럭바위와 주변 풍경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머물던 이언적은 이 바위를 ‘세심대(洗心臺)’라 이름 붙였다. 바위에 새긴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고 한다.

물길은 서원 내부로도 이어진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도랑이 발 앞을 가로지른다. 한두 걸음이면 족한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2층 누각(무변루)이 맞이한다.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에선 세심대를 타고 흐르는 폭포 소리가 유난히 가깝게 들린다.

옥산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발 아래로 작은 도랑이 흐른다. 옥산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발 아래로 작은 도랑이 흐른다.
나무 살창을 내어 계곡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 독락당의 담장. 나무 살창을 내어 계곡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 독락당의 담장.

마당을 가로질러 서원의 중심엔 ‘옥산서원’ 현판이 걸린 구인당이 자리한다. 그 옛날 유생들은 구인당에서 열띤 강의와 토론을 벌인 뒤, 맞은편 무변루로 자리를 옮겨 자연을 벗삼았으리라. 무변루·구인당 현판은 한석봉,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옥산서원은 내부를 둘러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주차장 인근 유물관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700m쯤 떨어진 이언적의 별장 ‘독락당’에도 가 볼 만하다. 서원 북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10분쯤 오솔길을 걸으면 자계천 맞은편으로 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옥산정사로도 불리는 독락당은 특히, 나무 살창을 내어 계곡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한 담장이 인상적이다.

퇴계 이황 선생 사후 지어진 도산서원의 강당(전교당). 퇴계 이황 선생 사후 지어진 도산서원의 강당(전교당).
퇴계 선생이 직접 짓고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 제자들이 늘어나자 마루를 더 확장했다. 퇴계 선생이 직접 짓고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 제자들이 늘어나자 마루를 더 확장했다.

■ 안동 도산서원

한국 서원의 역사에서 퇴계 이황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기 중후반 서원 건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소수서원이 배출한 퇴계의 문인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서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자리한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지은 도산서당에서 출발했고,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도산서원은 주변 풍광부터 남다르다. 드넓은 낙동강 물줄기를 마주하고, 수백 년 된 왕버들·느티나무가 서원 입구를 지킨다. 강 건너엔 ‘시사단’이 버티고 섰다. 1792년 정조는 퇴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 앞 지금의 시사단 자리에서 특별 과거시험(별시)을 열어 영남지역 인재를 선발했다. 이를 기념한 시사단은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지자 10m 높이의 석축을 쌓아 그 위로 옮겼다.

낙동강을 마주하는 도산서원의 입구. 강 건너편에 특별 과거시험이 열린 자리를 기념한 '시사단'이 보인다. 낙동강을 마주하는 도산서원의 입구. 강 건너편에 특별 과거시험이 열린 자리를 기념한 '시사단'이 보인다.

도산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도산서당이 나온다. 퇴계는 1561년 서당을 지어 머물면서 만년에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늘어나자 서당 마루를 확장했는데, 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바로 앞 네모반듯한 작은 연못(정우당)엔 군자를 닮은 연꽃이 자란다.

서당 뒤편으로는 퇴계 사후 건립한 전교당(강당)과 동재·서재, 광명실(서재) 등 서원의 주요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서원 왼쪽 유물전시관(옥진각)에는 퇴계 선생의 일대기와 함께 벼루·빗자루·지팡이·방석 등 다양한 유품을 살펴볼 수 있다.

느린 걸음으로 만난 한국의 서원, 사람됨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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