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국가가 제 역할 못할 때 발휘한 용기…‘플라이트93’과 ‘콘스탄트 가드너’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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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라이트93’과 ‘콘스탄트 가드너’. UIP코리아·스폰지 제공 영화 ‘플라이트93’과 ‘콘스탄트 가드너’. UIP코리아·스폰지 제공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매주 즐겼던 소소한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집 근처 DVD 대여점에서 영화를 한 편 골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인기가 좋은 영화는 이미 누군가 빌려 가 몇 주 연 허탕을 쳤던 기억도 납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킹’ 같은 명작들은 아예 구매해 놓고 복습 또 복습했습니다.

세계적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업체인 넷플릭스도 초기 사업모델은 DVD를 우편으로 대여하는 서비스였습니다. 넷플릭스는 올해 초까지도 서비스를 유지했으나, 오는 9월 29일이면 DVD 서비스를 종료합니다.

SNS에서 우연히 본 ‘슬로우뉴스’ 이정환 대표의 글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지난 18일, 기존 DVD 서비스 구독자들에게 깜짝 선물이라며 최대 10개의 DVD를 무작위로 보내주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한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라는 이 대표의 말에 공감이 갑니다.

또 한 가지 공감이 가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넷플릭스에 생각보다 볼 만한 영화가 없다는 지적입니다. 넷플릭스가 보유하고 있는 DVD는 10만 종에 이르는데 반해, 스트리밍하는 영화와 드라마는 미국 기준으로 6200종에 불과합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내 토종 OTT인 ‘웨이브’는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를 대거 업데이트했습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크’(2017) 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대표작들을 포함해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아일랜드’(2005), ‘포세이돈’(2006), ‘브이 포 벤데타’(2006), ‘어거스트 러쉬’(2007),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2007) 등 200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기자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지만 관람객의 평가는 괜찮은 작품 두 편을 골라 감상해봤습니다. 지인들 중에도 봤다는 사람이 없었던 ‘플라이트 93’(2006)과 ‘콘스탄트 가드너’(2006) 후기를 전해드립니다.


9·11 테러 마지막 피랍 여객기에서 벌어진 실화…‘플라이트 93’

2001년 9·11 테러 당시 납치된 여객기는 총 4대였습니다. 비행기 2대는 세계무역센터에, 1대는 펜타곤에 충돌했는데, 나머지 1대는 수도인 워싱턴 DC로 향하던 중 펜실베니아주 생크스빌의 벌판에 추락했습니다. 영화 ‘플라이트93’은 당시 마지막 피랍 여객기인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에서 승객들이 결사항전해 자살테러를 막은 이야기를 다룹니다.

영화는 뉴저지 뉴어크 국제공항에서 시작합니다. 관제센터는 민항기들과 교신하며 여느 때처럼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새로운 국장이 취임한 미국 연방항공청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합니다. 뉴어크 공항에서 출발하는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이하 ‘UA93’)은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아 승무원들도 여유로워 보입니다.

평온하던 9월 11일 오전은 아메리칸 항공 ‘AA11’편이 예고 없이 항로를 이탈하면서 금이 갑니다. 수 차례에 걸친 관제센터의 교신 시도에도 응답이 없더니, 이내 한 남성이 이국적인 발음으로 “비행기‘들’을 납치했다”고 말합니다.

근 20년 넘게 하이재킹 사건이 없었지만 점차 피랍 정황을 알리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군 당국과 연방항공청도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미 영공에 떠 있는 수 천대의 민항기 중 납치된 비행기들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비행기가 납치된 것으로 오해하며 혼란이 가중됩니다.

이때까지도 ‘여객기를 납치해 벌이는 자살테러’라는 초유의 사태를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맨해튼 상공에 있던 AA11이 갑자기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이내 CNN 방송화면에는 비행기가 충돌해 연기가 치솟고 있는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어 손을 쓸 새도 없이 또 다른 비행기가 센터 건물에 충돌하고, 미국 전역은 패닉에 빠집니다. 연방항공청과 군은 머리를 싸매지만 속수무책입니다. 군은 전투기를 출격하려 했지만 이륙 허가를 받지 못하고, 항공청과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전투기를 띄우더라도 납치된 비행기를 어떻게 막느냐 입니다. 자살테러를 막겠다고 무고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 여객기를 격추할 수도 없는 노릇. 이런 와중에 미국 국방부인 펜타곤 건물에도 비행기가 추락합니다. 그야말로 국가비상사태입니다.


영화 ‘플라이트93’. UIP코리아 제공 영화 ‘플라이트93’. UIP코리아 제공

정작 알카에다 조직원 4명이 타고 있는 UA93 승객들은 테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조직원들이 승객과 파일럿들을 흉기로 찌르고 기내를 장악했을 때도 비행기가 자폭테러에 이용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던 승객들은 대대적인 테러 사태를 알게 되고, 자신들이 타고 있는 비행기도 곧 추락할 것을 알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죽게 되는 상황. 동요하던 승객들은 이제 살기 위해 맨몸으로 테러범들과 맞섭니다.

영화는 ‘제이슨 본’ 시리즈 감독으로 유명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린그래스 감독 특유의 긴장감을 쌓아 올리다 폭발시키는 서사가 돋보입니다. 요동치는 기내의 모습을 핸드헬드(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기법)로 연출해 현장감과 몰입감이 상당합니다. 이야기 흐름은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적인데, 제작진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사건을 재현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캐스팅에서도 그린그래스 감독의 세심함이 엿보입니다. ‘플라이트93’에는 익숙한 할리우드 스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이 대거 배역을 맡았습니다. 실제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 조종사와 승무원이 출연했고, 9·11 당시 관제센터에서 근무했던 관제관과 군 관계자 등이 본인 역할을 직접 연기했습니다. 영화에서 미국 연방항공청 국장으로 등장하는 ‘벤 슬라이니’ 역시 실제 본인입니다. 포털사이트에 영화를 검색했을 때 주·조연 배우들 대부분이 프로필 사진조차 등록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기 공백’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승객들이 각자 가족과 통화하며 울음을 참지 못하는 장면에서 기자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수화기를 붙잡고 “사랑한다”며 흐느끼는 승객들과 기폭장치를 잡은 채 경전을 읊는 테러범들의 모습이 교차하는 장면에선 묘한 감정도 올라옵니다. 비행기 납치라는 대담한 테러를 실행에 옮기면서도 인간적인 두려움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4인조의 내면 연기도 대단합니다.


영화 ‘플라이트93’. UIP코리아 제공 영화 ‘플라이트93’. UIP코리아 제공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극영화보다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무능한 군과 국가 시스템을 직격하는 메시지를 담아낸 점은 그린그래스 감독답습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이야기는 미국인들에겐 익숙합니다. 생크스빌에 세워진 ‘플라이트93 국립추모전시관’에는 추락과 함께 숨진 탑승자 4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9·11테러 이후 미국에선 UA93 탑승객 중 한 명이 납치범과 몸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휴대전화로 말한 것으로 알려진 “시작하자(Let’s roll)”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 국민이 아는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완성도가 뛰어나지 못하면 비판을 한 몸에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플라이트93’은 훌륭한 만듦새 덕에 뉴욕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전미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런던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감독상, 영국제작자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데이빗 린 상, 편집상) 등에서 상을 휩쓸었습니다. 비록 수상하진 못했지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영화 편집상 등의 후보에 올랐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9·11 테러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웰메이드 작품 하나가 떠오릅니다. 마이클 키튼 주연의 영화 ‘워스’(2021)인데요. 9·11 테러 피해자 보상 기금 운영을 맡게 된 협상 전문 변호사가 보상급 지급 동의를 받기 위해 유족들을 만나러 다닌 이야기를 다룹니다. 스토리, 연기, 연출 3박자가 훌륭한데 국내 관객수는 3782명에 불과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개봉관이 적었던 탓에 기자도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 개인 일정을 조정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부와 사회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국가적 재난을 연이어 경험하고 있는 2023년 한국에도 많은 고민거리를 던질 수 있습니다.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스폰지 제공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스폰지 제공

진실을 좇다 발견한 사랑…‘콘스탄트 가드너’


제약업계, 케냐, 진정한 사랑.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콘스탄트 가드너’를 찍고 싶었던 세 가지 이유라고 합니다. 영화는 글로벌 제약회사가 아프리카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벌인 불법적인 실험을 영국 외교관 저스틴(랄프 파인즈)이 목숨을 걸고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차분하고 이성이 앞서는 저스틴은 열정적이고 감정이 앞서는 인권운동가 테사(레이첼 와이즈)와 사랑에 빠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스틴은 케냐 주재 영국 대사관으로 발령받고, 테사는 저스틴과 함께 케냐에 가기 위해 결혼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테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저스틴은 그런 아내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당부합니다. 테사가 의료봉사 활동에 전념하며 단짝처럼 붙어다니는 국경없는의사회 아놀드 박사와 내연관계인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저스틴이 포착하기도 합니다. 온화한 성품의 저스틴은 당장 아내를 몰아붙이진 않지만, 테사를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인 테사는 옳다고 믿는 일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듭니다. 봉사활동 중 거대 제약회사인 쓰리비의 불법적인 신약 실험 의혹을 포착하고, 배경을 파헤치는데 밤낮없이 매달립니다. 테사는 외교관인 남편에게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아 홀로 조사에 매진합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저스틴은 예전 같지 않은 테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사는 UN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아놀드와 함께 케냐의 로키로 떠났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옵니다. 대사관은 테사가 여행 도중 괴한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하지만 저스틴은 배후에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되고,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흑막을 추적합니다. 결국 저스틴은 쓰리비는 물론 정부까지 민간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불법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제 남은 의혹을 파헤치는 건 온전히 저스틴의 몫. 사건을 파고들수록 저스틴을 향한 위협이 커지고, 목숨까지도 위태로워집니다.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스폰지 제공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스폰지 제공


기자는 영화 줄거리를 시간 순서대로 설명했지만, 실제 극의 흐름은 조금 다릅니다. 중반까지는 플래시백(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적절히 활용해 사건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갔습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저스틴과 테사 부부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영국 베테랑 배우 랄프 파인즈는 누구나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을 법한 따뜻한 외유내강 캐릭터 저스틴을 완벽하게 연기했습니다. 레이첼 와이즈가 맡은 테사는 열정적이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면서도 사랑스러운 인물입니다.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인물의 사랑을 아련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호연 덕분입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저스틴이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아내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성격도 점점 테사처럼 변하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영화는 스릴러적 요소를 갖췄지만 두 배우 덕에 절절한 사랑이 돋보입니다. 특히 랄프 파인즈는 ‘한결같은 정원사’라는 의미의 영화 제목 ‘콘스탄트 가드너’처럼 우직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표현해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여우조연상), 미국 배우 조합상(여우조연상), 런던비평가 협회상(영국 여우주연상, 영국 남우주연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여우조연상) 등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메이렐레스 감독의 세심한 연출과 짜임새 있는 각본도 감상 포인트입니다. 저스틴이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제약사의 음모를 알게 되는 과정이 작위적이지 않고 개연성이 있습니다. 스릴러 영화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배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포스터에서부터 “보지도 말라…듣지도 말라…오직 그녀만을 믿어라!”라는 문구로 등장인물의 배신을 암시합니다. 졸작으로 평가 받는 영화들은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 배신하게 되는 이유가 허술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콘스탄트 가드너’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관객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는 저스틴의 쓸쓸함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됩니다. 회상 씬과 감정연기가 교차되는 신파적 장면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봐도 그리 촌스럽다거나 뻔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또 글로벌 제약회사의 위선, 아프리카를 착취해 성장한 선진국 등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전달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 각색상 등에 노미네이트 됐고,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편집상을 받았습니다.

웨이브에는 두 영화 외에도 누적 관객수는 적지만 완성도가 좋은 영화들이 다수 업데이트 됐습니다. 특히 기자가 극장에서 보고 감탄했던 ‘퍼스트맨’(2018), ‘칠드런 오브 맨’(2016), ‘미드나잇 선’(2018), ‘아메리칸 스나이퍼’(2015) 등을 추천합니다.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우주영화 ‘퍼스트맨’은 처음으로 달에 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의 인생을 섬세한 연출과 편집으로 그려낸 휴먼 드라마입니다. ‘칠드런 오브 맨’은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지구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신생아를 지키려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006년 공개됐지만 국내에는 10년이 지난 2016년에야 개봉했는데, 관객 수가 2만 명에 그친 게 아까울 정도로 완성도 높은 공상과학(SF) 영화입니다.

‘미드나잇 선’은 태양을 피해야 하는 희귀병을 앓는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다룬 로맨스물인데, 설렘을 안기는 오리지날사운드트랙(OST)이 기억에 남습니다. 실화 기반인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전설적인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삶을 그린 영화로,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이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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