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특공대 밀수, 부산 영도가 원조"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인터뷰
60년대 대마도 거점 특공대 밀수 기승
밀수왕 이정기 이야기 영화 만들었으면
올여름 최고의 영화는 '밀수'였다. 바다 배경이라 시원하지, 연기 좋지, 게다가 1970년대를 주름잡던 추억의 노래들까지…. 류승완 감독의 해양 범죄 활극 '밀수'가 지난달 30일로 누적 관객 수 500만 명을 넘겼다. 이 영화는 70년대 가상의 도시 군천에서 펼쳐지는 해녀들의 밀수 범죄를 그렸다. 엔딩 크레딧에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이 자문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부산일보> 등 지역 신문과 방송에 가끔 나와 낯이 익은 분이다. 생각난 김에 부산세관박물관을 찾아 진짜 밀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이 관장은 1975년 마산세관에 임용되어 2014년 부산본부세관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40년간 세관원이었다. 2019년에는 <부산항 이야기>를 출간했고, 부산세관박물관장을 맡아 부산항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밀수와의 전쟁'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부산본부세관 3층에 위치한 부산세관박물관을 직접 찾아가도 좋겠다.
부산세관박물관 이용득 관장이 마약 밀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문한 입장에서 영화 '밀수'를 어떻게 봤나
▲판타지 영화라 세관인 입장에서 보면 안 맞는 부분도 있다. 밀수의 배경인 여수 앞바다 백도는 부산 같으면 오륙도다. 그 바다에 다이아몬드가 든 가방을 던져 놓으면 물살이 세서 다 떠내려간다. 금괴를 항문에 숨겨 오는 장면에도 할 말이 있다. 반으로 쪼개면 몰라도 1㎏짜리는 사람에게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밀수 수색을 해도 찾던 물건이 나오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사람을 살펴봐야 한다. 사람 몸도 비창(秘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나 같으면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하겠다. 예를 들면 선원들이 수사에 협조해 줘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으니, 갑판에 정렬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피곤할 테니 앉으라고 한다. 항문에 물건을 숨기면 앉을 때 굉장한 고통이 따라와 표시가 난다. 얼굴이 새파래질 때쯤 엉덩이에 금속탐지기를 대면 '삐'하고 소리가 난다.
세관원 복제의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40년 세관원 생활을 하면서 밀수범을 많이 잡았나
▲자동차 시트 속에 넣어 둔 금괴 40㎏를 발견해 밀수범을 잡은 적이 있다. 사실 값비싼 외제 자동차는 함부로 손을 대기가 힘든데, 준비해 간 내시경카메라로 비추니 노란빛이 보여 금괴인 줄 눈치를 챘다. 밀수는 어떻게 은닉해 올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때로는 기름 탱크나 프로판가스통도 비창으로 변조한다. 한 사례를 소개하면 밀수선이 목포에 입항했다는 정보를 받고 갔는데 찾지를 못했다. 마침 가져갔던 청진기로 기름탱크에 대 보니 윙윙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면도기 2000대를 가지고 오다 파도에 배가 울렁대는 과정에서 일부가 켜져 소리가 난 것이다. 밀수 금액보다 기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밀수범을 잡는 것보다 밀수 역사를 집대성하는 역할이 컸던 것 같다.
-영화에서처럼 해녀들을 이용한 밀수가 실제로 있었나
▲해양대학교가 위치한 조도는 1967년 방파제 공사로 육지와 이어지기 전까지는 섬이었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조도가 1950년대 밀수 조직의 주목을 받았다. 시내와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데다 인근에 부산항의 외항선 묘박지가 있어서 밀수품을 육지로 운반하는 데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어선은 밀수품 운반선으로, 어구 창고는 밀수품 창고로 둔갑했다. 밀수품을 묘박지에 빠뜨리면 3~4명의 해녀들이 조업선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야간에 건져 갔으니 영화 그대로였다. 하도 밀수가 극성을 부려 1960년에는 조도에 세관 초소까지 설치했다. 결국에는 묘박지를 남구 용당동 신선대 쪽으로 옮기게 됐다. 스쿠버다이버를 세관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해녀를 이용한 해상 투하도 통하지 않게 됐다.
<부산일보> 1975년 12월 27일 자에는 ‘남녀 밀수 특공대 26명 적발’이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찾아보니 <부산일보> 1975년 12월 27일 자에는 '남녀 밀수 특공대 26명 적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부산항에 입항하는 외항선으로부터 지난 10년간 상습적으로 밀수품을 운반해 온 해녀특공대와 청년특공대 밀수 조직 26명을 적발했다는 내용이다. 검찰은 해녀특공대 두목 조 모 여인 집에서 외제 TV 18대, 미싱 2대 등 300만 원 상당을 압수했다. 이들은 10여 년 전부터 밀수를 생업으로 수억 원대의 밀수를 해 왔다는 것이다.
-'밀수 특공대'라는 용어가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데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을 거점으로 한 밀수꾼들이 달려들었다. 이들은 10t 규모의 소형 쾌속선으로 어둑할 무렵 이즈하라항을 빠져나와 공해상에서 야밤을 틈타 한국을 향해 질주했다. 국내에 잠입하면 밀수품을 도서나 해안에 내리는 식이었다. 다른 배에 옮겨 싣거나 바다에 투하하는 기법도 사용했다. 이즈하라항이 밀수 본거지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밀수왕 이정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주먹도 세서 밀수에서 능수능란한 실력을 발휘했다. 훤칠한 키에 미남인 그는 유흥가에서 돈을 잘 써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대마도에 현지처를 두고 일본인을 양부모로 모시기도 했다. 그는 밀수 특공대를 진두지휘해 큰 부를 쌓았다. 영화 '밀수'에서 조인성이 맡은 역할인 권 상사는 어떻게 보면 대마도 밀수 특공대의 이정기와 닮았다. 이정기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 무게감 있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속에 숨겨 온 금괴의 모습.
-왜 유독 부산에서 밀수가 성행했나
▲밀수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경제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부산이 밀수 도시가 된 것은 이웃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일본의 기술이 좋았다. 국제적으로도 해협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 있으면 밀무역이 성행한다. 1920년대 미국에서 금주령이 실행되었을 때 바하마의 낫소섬은 밀수로 번영했으나, 1930년대 금주령이 폐지되자 몰락했다. 대만도 이름난 밀수 섬이었다. 일본의 물건이 징검다리인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온 것이고, 그래서 국제시장이 각광받았다. 지금처럼 한국산 쿠쿠 밥솥이 일본 공항에서 팔리는 세상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금도 시세가 너무 비싸 돌 반지 등으로 통용이 안 되니 밀수도 잘 안 한다. 지금 세관이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마약이다.
-평생 세관인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밀수범은 수사관과 지능 싸움을 벌인다. 서로 쫓고 쫓기는 관계다. 과거에 밀수꾼은 일부러 시시한 밀수 전자제품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세관 직원들은 한 건 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겠지만, 사실 더 중요한 금을 숨겨 놓은 것이다. 밀수를 제보 없이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소득 분배가 제대로 안 되면 조직에서 제보가 들어 온다.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세관 직원의 3가지 금기사항이란 게 있다. 백색 가루(마약)와 노랭이(금덩이)를 멀리하고, 털(밍크털)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 관련이 되면 옷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수는 지하경제라 통계가 잘 없다. 경제학과 교수라고 해도 밀수범을 잡아 보지 않아 밀수를 모른다. 밀수는 세관 직원이 파헤쳐 주는 게 더 현실감이 있다. 밀수사(密輸史)에 대해 더 연구를 하고 싶다. 오늘날은 이야기의 시대가 아닌가. 예전 부산항 주변에 있었던 무수한 밀수 이야기는 그 시대를 설명하는 문화 콘텐츠다. 부산항을 배경으로 하는 흥미진진한 밀수 영화가 만들어져서 부산 영화의 바다가 더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글·사진=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