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실사화의 벽[남형욱의 오오티티]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믿지 못할 한마디(중략)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는 그야말로 내 어린 시절 전부였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학원이 끝나면 방영 시간을 맞추려 땀나도록 TV 앞으로 달려갔다. 매번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신체 일부를 고무처럼 늘이고 줄이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 루피와 함께 보물을 찾는 해적이 되어 모험을 떠나는 상상을 했다. 커가며 자연스럽게 '원피스덕후'가 됐다. 이 만화는 1997년 시작해 2023년 현재까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20년 넘는 꾸준한 연재에 '탈덕'의 고비도 없었다.

원피스 실사화 소식에 걱정이 앞섰다. '카우보이 비밥' '진격의 거인' 등 유명 만화의 실사화가 '코스프레 쇼'라며 혹평 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피스의 아버지 '오다 에이치로' 작가가 직접 제작에 관여했다고 하니 한 줄기 희망도 보였다. 마침내 지난달 31일 넷플릭스를 통해 원피스 시즌1 총 8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됐다. '넷플릭스TOP10'에 따르면 원피스는 현재까지 1850만 뷰, 시청 시간 1억 4010시간을 기록하며 글로벌 TV(영어)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일단 흥행은 성공한 셈.

뚜껑을 열었다. 아는 만큼 실망감이 더 컸다. 비현실적인 원작을 현실적인 질감으로 다루려고 한 탓이다. 가장 먼저 주인공 루피의 액션 연출이 문제다. 강하고 빠르게 묘사됐던 '고무 인간'의 능력은 물에 빠진 듯 흐느적거렸다. 원작에서 보여준 호쾌한 타격감은 없었다.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다. 세 자루의 칼을 쓰는 동료 '조로'와 메인 빌런 '아론'의 액션신은 어색한 CG 범벅으로 김이 빠졌다.

원피스의 스토리 라인은 크게 4부로 구성되는데 1부당 3개의 메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 에피소드 당 만화책 10권 분량이다. 단행본 106권까지 나왔다. 어마어마한 분량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다채로운 사건이 이어진다. 원피스의 매력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스토리다. 특히 예사로 넘겼던 인물이나, 대사, 배경이 결국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치밀한 복선 설계는 원피스에 깊게 빠져드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실사 드라마는 평이한 전개가 이어진다. 반전도 없고 복선도 없다. 원작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졌던 인물은 아예 삭제 당했다.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은 원피스 세계관 묘사다. 원피스 등장인물 대부분은 '해적'이다. 주요 공간적 배경이 배와 섬인 셈인데, 실사에서는 이 배경들이 꽤 잘 표현되어 있다. 하얀 염소 머리가 상징인 루피 일행의 고잉메리호, 붉은 머리 해적단의 레드포스호, 해상 레스토랑 발라티에는 '상상의 현실화'라는 실사의 매력을 잘 살렸다. 원피스 한 회당 제작비는 약 230억 원으로 알려졌다. 세트를 만드는데 제작비를 다 쓴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