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미군기지… 질곡의 100년 넘은 부산시민공원의 모든 것 [부산피디아 EP.13]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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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서울숲공원,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있다면 부산에는 부산시민공원이 있다. 내년에 개장 10주년을 맞는 부산시민공원은 지역의 랜드마크로 시민들의 삶 깊숙이 자리 잡았다. 면적 절반 가까이가 산지인 부산에서 축구장 60개 크기의 평지 공원이 도심에 있다는 건 시민들에게 큰 축복이다. 지금은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공원이지만 한 세기 동안 이곳은 금단의 땅이었다. 일제에 빼앗겼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점유했다. 부산시가 어렵사리 소유권을 넘겨받은 뒤에도 공원이 되기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가 응축된 질곡의 100년 세월을 넘어 마침내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부산시민공원의 역사와 의의를 살펴본다.


부산시민공원 전경. 부산일보DB 부산시민공원 전경. 부산일보DB

■부산시민공원은 어떤 곳?

부산시민공원은 부산 부산진구 연지동과 범전동에 걸친 47만 1518㎡ 규모의 공원이다. 부산에서 보기 드문 평지 공원으로, 중앙에 있는 ‘하야리아 잔디광장’ 크기만 축구장 6배에 달한다. 부산 최대 번화가인 서면과 직선거리로 1km도 되지 않아 접근성도 높다.

도심 속 평지 공원이라는 특징 덕분에 부산시민공원은 시민들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2014년 개장 이후 매년 700만 명 넘게 꾸준히 찾고 있다. 지난해 방문객은 837만 7000여 명에 달한다. 부산시민 한 명당 매년 2번 이상 부산시민공원을 찾은 셈이다.

부산시민공원의 밑그림은 뉴욕의 고가도로 위 공원인 ‘하이라인’ 설계자로 유명한 미국의 공원 설계가인 제임스 코너가 그렸다. 5개의 숲길은 각 주제에 맞춰 조경과 편의 시설이 풍부하다. 공원에 심어진 나무만 110만 그루가 넘는다. 옛 미군 장교 클럽을 개조한 공원 역사관 등 시민공원의 과거를 품은 공간도 곳곳에 조성돼 있다.


1930년 대 서면경마장에서 열린 경마대회 모습. 부산일보DB 1930년 대 서면경마장에서 열린 경마대회 모습. 부산일보DB

■일제 자본에 빼앗기다

오늘날과 달리 100년 동안 부산시민공원은 철저히 외부인의 것이었다. 부산시민공원의 옛 지번은 경상남도 부산부 서면 범전리다. 이 일대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지역민의 삶터이자 비옥한 농지였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명목으로 농민의 땅을 빼앗는다.

1920년대 일제가 부산진과 서면 등을 공업 지구로 지정하자 이곳에는 공장이 마구잡이로 들어선다. 이후 일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여가 시설의 수요가 늘면서, 1930년 이곳 4만 8000여 평에 1km 경주로를 갖춘 ‘서면경마장’이 개장한다. 준공 직후 열린 추계 경마에서 팔린 마권만 18만 6280장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잇달아 터지자 일제는 경마장을 폐쇄했다. 대신 군사용 마필 훈련소, 포로수용소, 군수품 야적장 등 전쟁 기지로 활용한다. 이처럼 부산시민공원은 공업 지구, 오락 시설, 병참기지 등 철저히 일제의 필요에 따라 이용당했다.

옛 하야리아 기지 모습. 부산일보DB 옛 하야리아 기지 모습. 부산일보DB

■미군이 점유한 ‘금단의 땅’

1945년 광복을 맞은 후에도 이 땅은 여전히 시민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 곧바로 들어선 미군이 해당 부지를 점유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잠시 철수하기도 했지만, 2년 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곳에 돌아와 ‘하야리아(Hialeah)’ 기지를 세운다. 북미 원주민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인 '하야리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던 유명한 경마장 이름이다. 서면경마장을 본 미군이 고향의 경마장을 떠올려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1953년 민족상잔의 비극은 막을 내렸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하야리아 기지는 고스란히 미군에게 돌아갔다. 하야리아 기지 안에는 미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군인 숙소뿐 아니라 학교, 병원, 체육관 등 부대 시설을 갖췄다. 하야리아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도 많았고, 이들 손을 거쳐 미군 군수품이 유통되는 등 당시 지역 경제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미군이 하야리아 기지를 반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하야리아 부지 시민공원추진 범시민운동본부에서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던 허운영 당감동 어린이도서관장은 “처음 하야리아 부지는 도심 외곽에 있었지만 점차 도시가 확장되면서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 요인이 됐고, 미군의 군사적 역할도 계속해서 줄면서 1992년부터 ‘우리 땅을 되찾자’는 시민 운동이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하야리아 부대가 폐쇄하며 미군 등 관계자들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야리아 부대가 폐쇄하며 미군 등 관계자들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반환부터 공원이 되기까지

1990년대부터 하야리아 부지 반환은 본격 궤도에 오른다. 1994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합동위 회의 때 하야리아 부지 반환이 처음 의제로 채택됐다. 이듬해 시민단체가 결성돼 하야리아 주변을 둘러싼 인간 띠 잇기 행사를 벌이는 등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2001년 한미 양측은 하야리아 기지를 포함한 전국 20개 미군 기지를 2011년까지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부산시는 하야리아 부지를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2004년 8월 근린공원으로 결정 고시했다. 하지만 국방부가 공원 지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미군 이전에 필요한 비용을 반환 부지 매각으로 조달해야 하는데, 공원으로 지정하면 부지 가액이 하락한다는 이유였다.

2000년부터 10년간 하야리아 업무를 맡았던 장승복 부산시 균형개발지원팀장은 “당시 공원 지정을 위해 국토교통부에 안건을 올렸으나 부결됐다. 국방부 담당자였던 현역 장군에게 ‘반드시 공원으로 만들 테니 두고 보시라’며 큰소리를 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2005년 부산시는 시장 권한을 활용해 하야리아 부지를 공공 공지로 결정하는 등 법적 근거를 마련한 끝에 공원 지정에 성공한다. 같은 해 12월 부지 이전 비용 70%를 국가가 부담하는 특별 법안까지 국회를 통과하면서, 마침내 2006년 8월 하야리아 기지는 완전히 폐쇄됐다.


부산시민공원에서 시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부산일보DB 부산시민공원에서 시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부산일보DB

■마침내 시민의 품으로

기지는 문을 닫았지만 곧바로 첫 삽을 뜬 건 아니었다. 기지 폐쇄 전인 2006년 4월부터 한미 양측은 105일간 환경 조사를 진행했다. 미군이 점유하는 과정에서 기름에 오염된 토지를 조사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환경 조사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한국과 이를 거부한 미국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환경오염 조사는 기약 없이 중단됐고 3년이 지난 2009년 5월이 돼서야 재개됐다. 정화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를 두고 팽팽히 맞서기도 했지만 결국 한국이 떠안게 됐다. 허 관장은 “땅을 오염시킨 미군에 정화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지를 빠르게 반환받기 위해 우리 정부가 부담을 떠안은 건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 1월 27일 오후 2시 부산시는 마침내 하야리아 기지 열쇠를 미군에게 넘겨받았다. 이어 부산시, 시민단체,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라운드테이블(원탁회의)’이 공원의 방향을 그렸다. <부산일보> 주도로 결성된 ‘하얄리아 공원포럼’도 공원 조성과 운영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었다. 2011년 8월 첫 삽을 뜬 부산시민공원은 2014년 5월 1일 마침내 개장했다.

장 팀장은 “내년이면 부산시민공원이 열 살이 된다. 부산시민공원은 미래 세대에게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자 문화 공간”이라며 “100년간 외세를 거쳐 부산 시민 품에 돌아온 부산시민공원이 앞으로도 더 성숙할 수 있도록 세심한 정책이 꾸준히 이어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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