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가해자가 돌아온다
김효정 젠더데스크
20여 명 여성 성범죄 피해 폭로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 공연 유감
성범죄자 관대한 복귀 항의 표시
프랑스 톱스타 여배우 돌연 은퇴
제대로 된 사과·반성·처벌 없이
가해자 복귀 받아들여선 안 돼
가을은 공연의 계절이다.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 다양한 무대가 연일 이어진다. 늘 이맘때면 예매한 공연 날짜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일상의 무게를 버티곤 한다.
올해 역시 어떤 공연을 예매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공연 일정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공연의 포스터를 발견하고 불쾌한 기분에 휩싸인다. ‘세기의 거장’ ‘오페라의 제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플라시도 도밍고의 내한 공연이다. 심지어 2030부산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는 문구에 한숨마저 나온다.
도밍고 그가 누구인가. 한때 세계 3대 테너로 불렸지만, 현재는 20여 명이 넘는 여성들이 그로부터 성희롱, 성폭행 피해를 봤다며 미투를 고발한 성범죄자이며 지난해에는 아르헨티나 성매매 수사에 연루되기도 했다. 미국 뮤지컬 예술가 조합과 도밍고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오페라단은 이에 대한 조사를 한 후 도밍고의 성범죄 혐의가 대부분 신빙성이 있다고 결론 냈다. 결국 도밍고는 미국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AP통신은 20여 년 이어진 도밍고의 성비리에 대해서 여러 차례 보도하기도 했다.
시민단체의 ‘성범죄자 도밍고 공연 반대’ 시위 속 열린 지난해 이탈리아 오페라 축제 공연에선 가사를 자주 까먹고 성량이 딸리는 모습을 보여 축제 최악의 공연으로 꼽혔다. 도밍고는 공연 마지막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일어나서 같이 인사하자고 손짓했지만, 단원들이 끝까지 거부하며 그의 공연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2017년 할리우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폭로를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불붙었다. 특히 유명세와 권력을 이용한 성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고백이 쏟아졌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지만, 남은 건 피해자의 절규뿐이다. 가해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현장으로 복귀하고 있다. 이들의 성범죄 행위는 업계의 관행, 가벼운 실수, 친근함의 표시, 오해, 유감 정도로 가볍게 포장된다.
올해 5월 프랑스의 스타 여배우 아델 에넬은 돌연 은퇴를 선언해 화제가 됐다. 2002년 13세의 나이로 데뷔해 20대 중반에 프랑스 최고 영화상인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잘나가던 배우였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의 길을 걸었고 한창 전성기를 누려야 할 그녀가 영화계를 떠나며 밝힌 이유는 이렇다.
“프랑스 영화계가 성범죄자들을 벌하는 데 실패했고, 성범죄 피해를 알린 여성들을 배척하고 있다. 나는 내 몸과 성실함 외에 다른 무기가 없다. 당신들은 돈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누리지만, 나는 당신들을 몰아내겠다.”
아델은 프랑스 국민배우로 칭송받던 제라르 드빠르디유, 세계적인 거장 감독으로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를 언급하며 성범죄 가해자로 고발당했던 그들이 여전히 대우받으며 활발히 활동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녀는 앞서 2020년 세자르상 시상식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되자 현장에서 “프랑스의 수치”라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우리 모두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재기할 기회는 줘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문구도 알고 있다. 중요한 건 가해자들이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했는지, 피해자가 그 사과를 받아들였는지를 봐야 한다.
미투 사건 후 2년 만에 무대에 복귀한 도밍고는 악의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고 오페라 세계에선 친근감의 표시인데 피해자들의 오해라고 변명했다. 그의 나이가 여든을 넘으며 ‘세계적인 거장의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될 것 같다’는 홍보도 붙였지만, 여전히 그의 공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이다.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 피해자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괴롭힘을 당하던 10대의 그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가해자의 반성도 사과도 처벌도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영광과 명예? 그거라도 찾아야 원점이고 비로소 19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은 미투 가해자들의 현장 복귀와 관련해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관대한 복귀가 이어질수록 가해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가해자가 돌아오고 피해자가 떠나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더 글로리’의 현실판 학폭 피해자로 알려진 이가 얼마 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또 한 명의 피해자가 떠났다.
올가을에도 여전히 반성없는 가해자의 성대한 공연은 이어진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