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일본 위스키 없어서 못 산다는데
희소성·다양성 추구하는 MZ 세대 취향 저격
히비키 30년·하쿠슈 25년 1병 314만 원 간다
기후 핸디캡 뚫고 한국 고유 위스키 부흥할까
위스키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저가 위주에서 고가 위스키로 수요가 확산하고 즐기는 종류와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과 대만 위스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 가격이 치솟고 없어서 못 산다는 말까지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위스키 인기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추세에 맞춰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도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위스키를 접할 수 있는 등 진입장벽도 낮아졌다. 일부에서는 한정판 위스키를 사기 위해 오픈런도 불사한다. 이제 위스키는 더 이상 ‘비싼 아재 술’이 아니라 MZ 세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힙한 문화’가 되고 있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지하 2층 푸드에비뉴에서 위스키를 추천하는 직원들. 롯데백화점 제공
∎위스키 수입 급증 올해 3만t 신기록 전망
젊은 층을 중심으로 위스키 인기가 높아지면서 올해 우리나라 위스키 수입이 사상 처음으로 3만t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 기간 ‘혼술’ ‘홈술’ 분위기를 타고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와인 수요는 꺾이고 있지만 위스키는 꾸준한 증가세다. 관세청이 최근 발표한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1~10월 스카치, 버번, 라이 등 위스키류 수입량은 2만 6937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6.8% 늘었다. 올해가 두 달이나 남은 시점에서 역대 연간 최대치인 2002년의 2만 7379t에 육박한 상황이어서 수입량 신기록 달성은 정해진 수순이다. 위스키 수입량은 2021년 1만 5662t에서 지난해 2만 7038t으로 72.6% 급증했고,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3만t을 넘어설 전망이다. 와인 수입은 오히려 줄어 위스키 인기와 반비례했다. 같은 기간 와인 수입량은 4만 7500t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8.8% 줄었다.
올해 1∼10월 위스키류 수입량은 2만6937t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26.8% 늘었다. 올해 사상 처음으로 3만t 선을 웃돌 것이 확실시된다. 사진은 서울 한 대형마트의 위스키 코너. 연합뉴스
∎아재 술? 2030 세대 즐기는 힙한 문화!
최근의 위스키 열풍에는 MZ의 인식 변화가 큰 몫을 했다. MZ에게 위스키는 더 이상 ‘알코올 도수가 높아 접근하기 어려운 아재 술’이 아니라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마시는 힙한 술’이 됐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는 위스키의 인기 배경을 MZ가 중요시하는 3가지 가치인 희소성, 다양성, 디테일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MZ에게 이제 술은 ‘먹고 마시고 취하는 것’이 아니라 ‘멋과 맛, 문화’로 소비되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위스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자랑하고 그 안에서 소통하면서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즐긴다. 다양한 음용 방식도 젊은 취향을 저격한다. 전용 잔에 소량으로 부어 마시는 ‘스트레이트’, 얼음을 넣어 차갑게 마시는 ‘온더락’, 탄산수와 레몬을 넣어 가볍게 즐기는 ‘하이볼’, 미지근한 물에 넣어 향을 강화한 ‘미즈와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 가능하다. 와인이나 맥주에 비해 알성비(알코올 가성비)도 높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대만 싱글몰트 위스키 카발란 온라인 시음회에 함께한 한 참가자가 시음회 장면을 자신의 SNS 채널에 올렸다. 골든블루 제공
∎오픈런에 고급 위스키로 수요 확대
올해 이마트가 판매했던 발베니 12년은 아침 일찍부터 오픈런이 시작돼 순식간에 6000병이 완판됐다. 세븐일레븐이 히비키 하모니 등 8종 2000병 한정판으로 선보인 ‘위스키 런’ 행사에서도 오후 2시 판매를 앞두고 오전부터 구매 행렬이 이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MZ의 취향도 ‘하이볼’ 위주 저가 위스키에서 고가에 다양한 종류로 진화하고 있다. 위스키는 원료에 따라 맥아만 증류해 사용한 몰트, 옥수수 등으로 만든 그레인, 몰트와 그레인을 혼합한 블렌디드 3종류로 나뉜다. 흔히 알려진 윈저, 조니 워커, 발렌타인 등이 블렌디드 위스키다. 또 원액 숙성 기간에 따라 8년 이상의 스탠더드, 12년 이상은 프리미엄, 15년 이상이면 슈퍼프리미엄급으로 나뉘어 숙성 기간이 오랠수록 희소성과 가격도 높아진다. 올해 위스키 오픈런을 주도한 것은 한 곳의 증류소에서 맥아를 원료로 만든 싱글 몰트 위스키들이다. 싱글 몰트는 맥켈란, 글렌리벳, 글렌피딕, 발베니 등 세계적으로 500여 종이 있다. 이 중에서도 발베니, 야마자키, 카발란 등 3대 제품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발베니는 스코틀랜드산, 즉 스카치위스키고 야마자키는 일본산, 카발란은 대만산이다. 카발란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소품으로 등장한 뒤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다.
야마자키 18년산
야마자키 12년산
∎일본 위스키 인기에 가격 급등
위스키의 주류는 서양이지만 일본 위스키가 세계시장에서 품질과 경쟁력을 인정받고 최근 세계적 위스키 열풍과 맞물리면서 몸값이 급등하고 있다. 2014년 산토리 야마자키가 본고장 영국의 스카치위스키를 꺾고 세계 최고의 위스키로 선정됐다. 일본은 장기 불황으로 위스키 산업도 위축돼 원액 생산을 줄였다. 그런데 최근 불어닥친 위스키 열풍으로 수요가 늘고 있지만 수년간 숙성시켜야 하는 위스키 특성 때문에 공급 부족 사태를 빚고 있는 것이다. 산토리는 내년 4월 1일부터 프리미엄 위스키 19종 소매가를 20~125% 인상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히비키 30년, 야마자키 25년, 하쿠슈 25년은 700mL 한 병에 기존 16만 엔(140만 원)에서 36만 엔(314만 원)으로 125% 오른다.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일본에서 위스키가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사는 게 이득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다. 대만의 카발란도 올해 판매량이 폭증하며 인기를 누렸다. 대만의 고온다습한 기후가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평가다.
∎한국 고유의 위스키는 안 되나
일본과 대만도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 우리의 보리로 만든 국내산 위스키는 안되는 걸까. 국내에는 대규모 위스키 양조장이 없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원료와 기후를 꼽는다. 위스키는 곡물로 발효주를 만든 다음 증류한 투명한 원액을 오크통에 숙성시켜 만들어지는 술이다. 우선은 원료로 중요한 곡물이 보리인데 우리는 기후 특성상 6줄 보리 위주고 위스키 원료인 2줄 보리가 드물다. 오크통 숙성 과정도 문제다. 위스키는 알코올 도수가 높아 오크통 안에 가만히 놔둬도 자연 증발해 없어지는 부분이 있고 이를 ‘엔젤스 쉐어’(천사의 몫)라 부른다. 숙성 기간이 길수록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이유다. 위스키 유명 산지인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일본 홋카이도, 미국 켄터키주 등 지역은 기후적 영향으로 자연 증발이 연 2% 정도인데 한국은 5%가 넘는다. 해가 갈수록 누적되기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 차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김창수위스키증류소가 최근 싱글몰트 위스키를 선보이고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완판 위스키’ ‘품절 위스키’라는 별명을 얻으며 고군 분투하고 있다. 일본과 대만 위스키의 성공 뒤에도 장인들의 끈질긴 집념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귀한 움직임이다. 위스키가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는 시대에 국내 위스키 산업도 기후라는 핸디캡을 뚫고 꽃피울 수 있을까.
강윤경 논설위원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