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멀리 가야 좋은 여행인가요…우리가 몰랐던 ‘좌천동의 품격’
부산 역사 기행 동호회 ‘노랑배낭’
동구 좌천동 일대에서 번개 답사
“우리 삶터 의미·소중함 새삼 느껴”
“수시로 동상을 마주쳤지만 사실 정발 장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 답사에서 정말 많은 걸 느꼈습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9일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진행된 ‘노랑배낭’의 부산 알기 번개 답사에 참여한 이준욱(48) 씨의 소감이다. 초량동 부산고 인근에 사는 이 씨는 집 아래 초량교차로의 정발 장군 동상을 오가면서도 장군의 업적이나 생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했다.
노랑배낭은 70여 명의 부산 시민을 회원으로 둔 역사 기행 동호회다. 올해 초 결성돼 진주·사천을 시작으로 함양군, 창녕군, 통영시, 고성군, 거창군 등 경남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날 좌천동 답사는 ‘사부작 동구 번개 역사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정작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획된 행사다.
오전 10시. 가벼운 차림으로 도시철도 좌천역에 모인 20명의 답사단은 첫 방문지로 정오연 생가터를 찾았다. 정오연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꾀하다 열일곱 살이던 1945년 해방 직전 옥사한 독립유공자다.
조그마한 슈퍼마켓 한 켠에 독립유공자 정오연의 학창시절 사진 등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가게에서 정오연의 막냇동생 정성연 씨 부인인 이영자(80) 씨가 일행을 맞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가게를 지키는 이 씨는 답사단의 ‘번개 방문’을 제 일처럼 반기며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일화를 조곤조곤 풀어놓았다.
가게를 나온 답사단은 길 건너편 정공단으로 이동했다. 시대는 어느새 일제강점기에서 300년 이상을 거슬러 오른 조선 중기. 정공단은 임진왜란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에서 순국한 충장공 정발 장군을 기리는 제단이다.
구도심 좌천동 골목길에서 만난 인물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맥켄지(한국명 매견시) 목사다. 목사는 1910년 호주장로회 선교사로 부산에 온 후 부인 켈리와 뜻을 모아 선교와 나환자 돌봄에 생을 바친 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의 두 딸 헬렌(매혜란)과 캐서린(매혜영)은 호주에서 공부를 마치고 각각 의사와 간호사가 돼 귀향,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했다. 병원 담장과 건물 내에 맥켄지 일가 기림비와 역사관이 있다.
반나절 반짝 진행된 답사지만 내용은 허투루가 아니었다. 답사단은 부산 최초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와 인근의 안영복 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부산진성 성벽, 증산전망대까지 ‘부산포 개항가도’로 불리는 좌천동 일대를 부지런히 누볐다.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해설로 박수를 받은 박종성(56) 답사팀장은 “좌천동은 부산 지명의 탄생부터 항일과 애국 정신, 근대 서양 의학의 전파까지 부산의 모든 역사를 만날 수 있는 부산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박 팀장은 새해 초 서구에서 부산 알기 번개 답사를 이어 갈 구상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답사에 함께한 남성학(63) 씨는 “유명 관광지도 좋지만 우리 삶터 주변의 역사부터 알려는 노력이 소중하다는 걸 느꼈다”며 “보훈부 등 관련 기관들이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