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어울리는 영화 찾는다면…‘리빙: 어떤 인생’ 어떤가요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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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도 어느덧 반이나 지났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연말에 어울리는 따뜻한 분위기의 영화가 개봉하곤 했는데요, 올해는 ‘서울의 봄’이 극장가를 강타해 ‘연말 영화’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자는 명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각색상 후보에 올랐던 ‘리빙: 어떤 인생’을 소개합니다.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남은 생 6개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빌 나이라는 원로 배우를 아시나요. 이름은 생소할 수 있지만, 얼굴은 잘 알려진 명배우입니다. 한국 영화 팬들에게는 ‘어바웃 타임’(2013)의 아빠 역이나 ‘러브 액츄얼리’(2003) 속 한물간 록스타 ‘빌리 맥’ 역으로 익숙할 것 같습니다.

원로 배우가 주인공을 맡는 영화는 보통 죽음이나 인생을 주제로 합니다. 올해로 만 74세인 빌 나이가 주연을 맡은 ‘리빙: 어떤 인생’ 역시 삶을 성찰하게끔 하는 작품입니다. 빌 나이는 이 작품에서 보여준 명품 연기로 데뷔 47년 만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됐습니다.

지난 13일 개봉한 ‘리빙: 어떤 인생’은 195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윌리엄스(빌 나이)는 런던시청 공공사업과 책임자입니다. 꼼꼼하고 깐깐한 윌리엄스는 신사적이긴 하지만, 시종일관 유지되는 그의 무표정에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윌리엄스는 그저 기계처럼 일할 뿐입니다.

그런 윌리엄스가 어느 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FM’대로 살아온 윌리엄스지만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뽑아 한적한 시골로 무작정 떠나 봤는데, 막상 도착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아내와 일찍 사별한 윌리엄스는 평생 인생을 즐겨 본 적이 없습니다. 식당에서 만난 예술가 청년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청년은 윌리엄스와 함께 향락가로 향합니다. 그러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유흥에 빠지기는 어렵습니다.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잔잔하지만 오래가는 파동…‘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문케 해

윌리엄스는 부하 직원이었던 젊은 여성 해리스(에이미 루 우드)를 통해 답을 얻습니다. 활기찬 삶을 사는 해리스처럼 되고 싶어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원조 교제를 의심하는 소문이 퍼지지만 윌리엄스는 절박합니다. 해리스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잊어버렸다고 한탄하던 날, 윌리엄스는 문득 깨달음을 얻습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윌리엄스는 생기를 찾고,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업적을 남깁니다.

이 영화는 사실 일본 거장 고(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 ‘이키루’(1952)를 원작으로 합니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각색을 거쳐 배경이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은 원작과 일치합니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삶, 품격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그마한 답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윌리엄스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한탄하는 모습에서는 공감을 느끼고,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소신을 밀어붙이는 모습에서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큰 감동은 없었지만, 잔잔한 여운을 남깁니다.

영화의 메시지 못지않게 좋았던 것은 연출입니다. 통근 열차를 기다리는 신사들이 모인 기차역에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고즈넉하고 클래식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특히 피아노와 관현악기를 적절히 활용한 배경음악이 감성을 자극합니다. 술에 취한 윌리엄스가 피아노 반주에 맞춰 스코틀랜드 민요 ‘the Rowan Tree’를 부르는 장면은 울림을 줍니다.

빌 나이의 관록이 묻어나는 호연도 관람 포인트입니다. 신파를 배제한 덤덤한 연출이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1950년대 영국을 재현하는데 신경을 쓴 미장센과 따뜻한 색감 등 영상미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티캐스트 제공

‘리빙: 어떤 인생’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 보기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서울의 봄’이 워낙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탓에 상영관이 너무 적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서울의 봄’이 극장가에 봄을 불러온 점은 참 반갑습니다. 지난달 22일 개봉한 ‘서울의 봄’은 15일 오전 현재까지 773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측대로 ‘범죄도시 3’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천만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입니다.

‘서울의 봄’ 상승세를 보니 한편으론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연말을 맞아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한국영화 대부분은 손익분기점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영화계에서는 온갖 핑계를 댔습니다. 심지어 한 감독은 관객을 탓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조롱만 당하고 끔찍한 성적표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비싸진 티켓값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활성화 등 이전보다 영화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서울의 봄’ 흥행은 ‘영화가 재밌으면 관객은 극장에 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새삼스레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올해 한국 영화 대부분은 극장에 가서 찾아볼 만큼의 재미는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극장가에 불어온 훈풍에 힘입어, 부디 내년에는 한국영화가 순항하길 바랍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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