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바친 교사보다 더 잘 쓴 AI 생기부, 걸러낼 장치가 없다
입시 공정성 위협하는 챗GPT
무료 생기부 작성 프로그램 등장
문구 작성 고민 교사에겐 구세주
교사 ‘고유권한’ 원칙 위배 논란
현행 ‘유사도 검사’론 검증 한계
대세 인정해 윤리적 활용 논의를
학생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는 학생의 생활 태도와 성장 변화를 담은 보고서로, 교사가 관찰·평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생에 대해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상급학교의 학생 선발에 활용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챗GPT를 활용해 생기부를 작성한다면 교사가 작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활용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느 정도 활용했는지를 검증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생기부 폭탄에 챗GPT는 구세주?
‘차세대 나이스 개발에 쓴 2800억 원의 1%만이라도 이런 데 썼어야’ ‘생기부 천사’….
특정 주제의 챗GPT를 만들어 공유하는 한 플랫폼에 게시된 '행발 작성 프로그램'에 대한 찬사들이다. 행발은 생기부 항목 중 하나인 ‘행동특성및종합의견’의 줄인 말로, 담임교사가 작성한다. 행발 챗GPT에 학생과 관련된 정보인 ‘반장’ ‘성실함’ ‘리더십’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순식간에 ‘~했음’ 형태의 일명 ‘음슴체’ 글이 작성된다.
부산의 한 대입 전문가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완성도 높은 생기부 문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면서도 “문구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교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평가했다.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은 온라인 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학교와 공공기관 등에 챗GPT를 비롯해 해외 IT 프로그램의 구매를 대행하는 B업체는 지난달 말부터 챗GPT4.0 버전을 접목한 무료 생기부 작성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몇 가지 조건을 입력하면 챗GPT가 교사가 쓴 것 같은 ‘평가 문구’를 가미한 결과를 보여준다고 안내하고 있다. 업체 측은 “요즘 하루 1000명 정도 이용하며 한때 동시 접속자가 많아 서버가 다운된 적도 있다”며 “회사의 주된 고객인 교사의 생기부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고 말했다.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서는 ‘생기부 작성을 위한 챗GPT 꿀팁’ 류의 정보성 글이 수두룩하다. 유튜브나 숏폼 등 동영상 콘텐츠도 넘쳐난다.
생기부 작성에 챗GPT를 활용하는 교사들은 생기부 업무의 피로도를 호소한다. 생기부는 항목별로 500~700자 내외로 작성한다. 교과 과목은 수업 듣는 모든 학생이 대상이며 담임교사는 창의적체험활동의 자율활동, 진로활동 특기사항, ‘행발’도 작성해야 한다. 일부 학교 관리자들은 교사들에게 최대한 제한 글자 수를 채워서, 겹치는 표현 없이 작성하도록 요구한다. 부산의 한 교사는 “교사들 사이에서 생기부는 생을 기부하는 것이라는 자조가 있을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다”며 “생기부에 다양한 표현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은데 챗GPT를 이용하면 업무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보조적 수단 VS 교사 권한 포기
문제는 생기부가 고입이나 대입 등 입시 전형에 활용된다는 점이다. 대학에서는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에서 생기부를 성적 산출의 기준으로 삼는다. 고입에서도 특목고 등 입학 전형에 생기부는 중요 자료가 된다. 상급학교는 교사가 관찰해 작성한 생기부 문장을 평가해 입시 결과에 반영한다.
신뢰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입시용 생기부에서 교사가 아닌 챗GPT가 학생을 평가한 문구가 들어갈 경우, 생기부의 신뢰도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생기부 작성에 챗GPT를 활용하는 교사들은 기우라고 이야기 한다. 학종 전형에 지원할 경우, 학생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드러나도록 작성해야 하는데 IT전문가가 아닌 대부분의 교사가 챗GPT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부산일보 취재팀이 챗GPT를 이용해 생기부 작성을 시도한 결과, 교사가 작성한 생기부를 통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의 생기부 문장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챗GPT로 생기부를 작성하면 교사가 작성한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교육부 지침을 어긴다는 의견도 있다. 교육부 관련 지침에서 생기부 작성을 교사의 ‘고유 권한’으로 명시하고 있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요구하는 문장을 생기부에 반영하지 말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챗GPT의 생기부 활용에 부정적인 한 교사는 "교과나 학종 전형에서 서류평가의 의미가 흔들 수밖에 없다"며 "생기부에 학생이 요구하는 문장도 못 넣게 하는데 챗GPT가 써 준 문장을 넣는다는 것은 모순"이라며 "학생들이 챗GPT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막으면서, 대입 서류평가의 과제라 할 수 있는 생기부 작성시 챗GPT 활용에는 문제가 없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가이드라인 요구
사실상 올해 수시 전형을 마친 대학 측은 아직은 챗GPT 활용이 문제되는 수준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부산대학교의 한 입학사정관은 “일부 교사들이 챗GPT로 생기부를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며 “올해 생기부에서 관련 동향이 파악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대학입학사정관협의회 이상지 회장은 “개별 대학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협의회 차원에서 관련 사항이 논의된 적은 없다”고 밝혔다.
교사가 챗GPT를 활용해 생기부를 작성하더라도 기술적으로 걸러내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생기부의 신뢰도를 검증하는 ‘유사도 검사’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유사도 검사는 동일 어구의 반복 정도를 감안해 베껴 쓰기가 의심되는 생기부 문구를 걸러내는 방식이다. 이 회장은 “챗GPT의 특성을 감안할 때 유사도 검사와는 다른 장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동아대 전자공학과 김종욱 교수도 “시시각각 표현하는 어구를 달리하는 챗GPT의 특성상 챗GPT로 작성한 문구를 정확하게 걸러내기는 사실상 힘들다”고 말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챗GPT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교육당국의 빠른 대응을 주문했다. 부산일과학고 권혁제 교장은 “수행평가에서 챗GPT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부터 생기부 작성까지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많다”며 “현장에서 챗GPT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하루빨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기술의 일상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점을 감안해 생기부 등 교육 전반의 개선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부산대 교육학과 이상수 교수는 “교사의 챗GPT 사용 능력에 따라 생기부 질이 달라질 수 있다”며 “챗GPT 확산을 염두에 두고 학교 현장에서 적극적 활용과 윤리적 사용 방법을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지연 기자 sj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