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연극하고 싶어 못 죽지” 무대 불태우는 노익장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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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0대 늦깎이 시민 배우
북구 ‘신선온탕’서 연극 만나
황혼기 들어 처음 연극 접해
극단 들어가려 나이 속이기도

지난 7일 북구 덕천동 문화공간 '신선온탕'에서 만난 시민 연극배우들이 웃고 있다. 왼쪽부터 조섭제, 최복덕, 이화자, 서애자 씨. 탁경륜 기자 지난 7일 북구 덕천동 문화공간 '신선온탕'에서 만난 시민 연극배우들이 웃고 있다. 왼쪽부터 조섭제, 최복덕, 이화자, 서애자 씨. 탁경륜 기자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노년기의 중요성이 커진 부산에서 연극과 만나 새 삶을 살게 된 노인들이 있다. 연극은 이들에게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 됐고 살아가야할 이유로 자리매김했다. 인생의 막바지에 연극을 처음 접한 이들은 고령층에게 연극은 삶의 활력을 더해주는 보석같은 존재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무대에 서고 싶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지난 9일 부산 북구 덕천동에 마련된 문화공간 ‘신선온탕’에서 만난 노년 배우 4명의 첫인상은 매우 밝았다. <부산일보> 취재진과 처음 마주한 이들의 표정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생기가 넘쳤고 평균연령 8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이들은 황혼기에 연극에 뛰어든 시민 배우들로 북구에서 활동 중인 연극공동체 ‘온’을 통해 연극을 처음 접했다. 문화공간 ‘신선온탕’은 극단 ‘해풍’과 실버극단 ‘청춘은봄’을 포함해 시민극단, 청소년극단, 어린이극단이 모인 연극공동체 ‘온’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실버극단 ‘청춘의 봄’과 남산정복지관 연극단에서 활동 중인 이들은 연극의 참맛을 알게 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연극 참여를 권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고령인 이화자(91) 씨의 열정은 여느 젊은 배우 못지않다. 지난해 처음 연극을 접한 이 씨는 연극을 위해서라면 ‘부상투혼’도 마다하지 않는 노력파다. 지난해 연극 ‘콩나물 대가리’를 준비하던 이 씨는 일상생활 중 넘어져 척추 골절상을 입었다. 입원이 필요할 정도로 아찔했던 상황이라 공연 관계자들은 그녀에게 회복에 전념할 것을 권했지만 이 씨는 공연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적극 드러냈다. “병원에서 안 보내주면 탈출해서라도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던 이 씨는 실제로 병원 측과 상의 후 퇴원을 감행했고 복대를 차고 공연 연습에 참석했다. 연기 실력이 없어 연극단원들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된다며 겸손해하는 이 씨는 ‘타고난 연기자’라는 평가를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이 씨가 처음 연극을 시작한 계기는 자신을 위한 도전이었다. 지난해 북구 남산정복지관에서 처음 한글을 배운 이 씨는 복지관에서 연극단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극을 배워보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알지 못했던 한글을 배우고 편지도 쓸 수 있게 되면서 자신감이 생긴 것. 이 씨는 “연극을 본 적도 없고 연극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며 “나이 때문에 연극단에 들여주지 않을 것 같아 나이를 10살이나 낮춰 지원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화자(왼쪽) 씨가 지난해 열린 연극 무대를 마친 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남산정복지관 제공 이화자(왼쪽) 씨가 지난해 열린 연극 무대를 마친 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남산정복지관 제공

이들은 연극을 통해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인생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점과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잘 소화하기 위해 캐릭터를 연구하고, 이를 표현하는 데서 느끼는 책임감과 즐거움을 장점으로 꼽았다.

조섭제(74) 씨는 “젊을 때는 대부분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지만 은퇴하고 나서는 노는 것밖에 할 게 없다. 하지만 연극을 하게 되면 자신만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해야 할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삶에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 연극의 만족도는 노는 것과 비교가 안 된다. 연극 연습을 하다 보면 내 삶이 걷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최복덕(79) 씨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학교도 보내주지 않는 과거 시대상황을 다룬 ‘학교가는길’이라는 연극에 참여했는데 연극을 통해서 그 당시 상황과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며 “연습 과정에서 누구나 실수도 하는데 결국 그게 연극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참 보람 있다”고 뿌듯해했다.

서애자(83) 씨는 “나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유혹하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질투를 느끼는 역할을 맡았는데 나이 80살 먹고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치마도 입어봤다. 모처럼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 즐거웠다”며 “2년 전쯤에는 공부를 해볼까 싶어 방송통신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연극반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나이 들어서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생각하니까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2021년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부산에서 노년기 연극 체험을 제도화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들은 황혼기에 연극을 배우는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며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털어놨다.

최복덕 씨는 “어린이들부터 어르신들까지 연극 공연을 위해 모이면 다양한 연령대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어 분위기가 활기차고 기분이 좋다”며 “연극을 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부러워하고 공연장도 직접 찾아와 응원도 하더라. 공연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건강도 챙기게 된다”고 장점을 꼽았다.

서애자 씨는 “나이가 제각각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이야기하는 건 이 나이에 쉽게 하지 못하는 경험”이라며 “경로당에 앉아서 화투 치고 하는 것보다 이런 게 훨씬 좋다. 건강이 따라주는 한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화자 씨는 “전에는 웃을 일도 없고 우울했지만 연극으로 우울증을 극복한 지금은 집에서 노래도 한다”며 “전에는 인생에 재미가 없어 일찍 죽어야지 생각했다가 이제는 연극이 하고 싶어 못 죽을 것 같다”고 수줍게 웃었다.


서애자(왼쪽)씨와 조섭제 씨가 지난해 연극공연에서 공연하는 모습. 연극공동체 ‘온’ 제공 서애자(왼쪽)씨와 조섭제 씨가 지난해 연극공연에서 공연하는 모습. 연극공동체 ‘온’ 제공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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