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켄 로치의 마지막 특강 ‘나의 올드 오크’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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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암시한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장편작이 될 것으로 보이는 ‘나의 올드 오크’가 지난 17일 개봉했습니다.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자의 권리를 조명하는 작품을 꾸준히 내놓은 로치 감독의 신작은 역시나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로치 감독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사랑하는 시네필이라면, ‘나의 올드 오크’는 필람 영화입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나의 올드 오크’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2019)를 잇는 영국 북동부 3부작의 피날레이자 로치 감독의 15번째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입니다. 영화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소시민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쇠락해가는 이 한적한 동네 주민들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내전을 피해 영국으로 온 시리아 난민들입니다. 난민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주민들은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욕지거리를 퍼붓습니다. 아이들이 타고 있으니 비속어는 자제해 달라는 공무원의 호소도 통하지 않습니다. 총탄을 피하러 왔다가 따가운 눈총을 맞게 된 난민들은 죄인이라도 된 듯 황급히 건물로 몸을 피합니다.

훌리건으로 변한 주민들 사이에 신사답게 행동하는 중년 남성 토미 조 밸런타인(데이브 터너)이 있습니다. ‘TJ’라 불리는 그는 난동을 피우는 주민을 말리고, 난민의 짐을 옮겨주면서 주민들의 무례에 대해 대신 사과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증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1980년대 폐광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동네엔 희망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TJ의 친구 찰리(트레버 폭스)는 한때 집을 가진 게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집값이 크게 추락해 이제는 집이 그의 족쇄가 됐습니다. 경제적 곤궁은 외부인을 포용할 여력이 없게 만듭니다. ‘왜 런던 부촌에는 난민을 수용하지 않느냐’는 한 주민의 일침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이기주의자에 일갈하는 켄 로치의 페르소나

난민에게 우호적인 TJ도 사정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올드 오크’라는 펍을 운영하는 그는 가게 간판을 고칠 돈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 주민과 다투다 카메라가 파손된 난민 여성 야라(에블라 마리)에게 동정심을 느껴 물심양면으로 돕습니다. 로라(클레어 로저슨)를 비롯한 일부 주민들도 새 이웃이 된 이주민들에게 기꺼이 베풉니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바스티안 베르브너의 저서 <혐오사회>는 “더 많이 접촉하고 더 가까이 있을수록 편견은 줄어든다”고 알려줍니다. 극중 난민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도 그들과 함께 접촉하고 대화하며 점차 마음을 엽니다.

문제는 편견에 사로잡혀 변하지 않는 인간들입니다. 이들은 일부 마을 사람들이 이주민과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불만입니다. 특히 올드 오크의 단골 손님인 남자들은 ‘마음 편히 모여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공적 공간’이라며 펍에 이주민들이 드나드는 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이주민을 돕는 TJ를 향해 저속한 비난과 조롱을 퍼붓고, SNS에선 혐오 표현을 쏟아냅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시대 관통하는 교훈 ‘함께 먹고 살기’

로치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문제의식은 분명하고 직접적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연대’의 중요성을 연신 강조합니다.

극중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저열한 말을 쏟아내며 사회를 좀먹는 불한당들에게 TJ가 내뱉는 논리정연한 일갈은 로치 감독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요 인물을 통해 전달되는 대사는 중동에서 반복되는 무력 사태에 무관심한 국제사회와 세계시민을 향한 쓴소리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라고 질문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시적인 문제에 당면했을 때 문제의 진짜 원인 대신 나보다 더 힘없는 약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로치 감독은 그러나 관객을 꾸짖기 위해 ‘나의 올드 오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아도취와 선민의식에 빠진 노장의 꼰대질이 아니라, 분열과 혐오로 점철된 작금의 세상에 대한 우려를 담아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로치 감독이 영화 서사를 통해 말하는 인본주의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이상적인 사회의 단면을 그린 마지막 장면은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듭니다. 다소 감상적인 면이 있기도 하지만,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극중 인상적인 문구가 여럿 있지만, 기자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나의 올드 오크’가 전하는 연대의 메시지는 세대, 성별, 계층별로 가리가리 분열된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꼭 필요합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영화사 진진 제공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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