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노벨상 수상자들의 호소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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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남미권 내 문화·학술·교육의 중심 국가다. 과학기술 부문의 수준도 높다. 우리나라는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과학기술 부문 노벨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했다. 베르나르도 후세이(1887~1971)와 세사르 밀스테인(1927~2002)이 생리의학상을 1947·1984년에 각각 받았고, 1970년엔 루이스 페데리코 르누아르(1906~1987)가 화학상을 받았다. 원자력과 위성 분야에서도 상당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근년에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등 바이오와 나노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2030년까지 자국의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 아래 ‘과학기술혁신 국가계획’(PNCTI)을 2022년 수립해 추진해 왔다. 그에 앞서 2019년에는 국가 중점 전략으로서 ‘인공지능 국가계획’(Argen IA)을 발표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 등으로 사회 불안이 확대되는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를 부흥시키겠다는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 6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아르헨티나의 과학기술이 위기에 처했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과학 인프라가 없으면 국가는 무방비 상태에 빠지고 국민의 미래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삭감된 과학기술 예산을 복구시킬 것을 촉구했다.

지난해 12월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 급변했다. 극우 성향의 자유전진당 소속인 밀레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좌파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다”며 대규모 정부 지출 삭감과 함께 ‘정부 R&D(연구개발) 투자 중단’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밀레이 대통령은 당선 뒤 과학기술부를 폐쇄하고 아르헨티나 최대 연구기관인 국립과학기술위원회(CONICET)를 비롯한 각종 연구소의 인력과 예산을 대대적으로 줄이고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중단시켰다.

아르헨티나 과학계는 충격에 빠졌고, 상당수 과학기술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 나갈 조짐도 보인다. 밀레이 대통령을 향한 68명 노벨상 수상자들의 호소는 아르헨티나 과학계의 그런 현실을 대변한 것이다. 만 리 밖 타국의 이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올해 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작금의 우리 상황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테다. 동병상련이랄까!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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