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황혼이 삶의 열정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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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건배사에 ‘9988’이 유행하고 있다. ‘99세까지 88하게 살자’라는 건배사로 건강한 100수를 누리자는 뜻이다. 실제로 보험개발원이 생명보험 가입자를 상대로 집계한 평균수명은 남자 86.3세, 여성은 90.7세로 나왔다. 5년 전보다 2.8세, 2.2세씩 늘었다. 여성 평균수명이 90세를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80대를 가리키는 ‘옥토제너리언(Octogenarian)’이 화제다. 바이든(1942년생)이나 트럼프(1946년생) 누구라도 당선되면 80세 안팎의 대통령이 나오기 때문이다. 1930년생 동갑으로 94세인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는 아직도 존재감이 확연하다. ‘1928년부터 네 남자를 훔친다‘는 인스타그램 계정(@baddiewinkle)에서 316만 9000명의 팔로워를 갖고 있는 인플루언서 헬렌 윙클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미래 모습에 열광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르합창단 공연 장면. 4월 9일 부산 해운대문화회관에서 80세 이상 회원들만의 공연을 가진다. 아모르합창단 공연 장면. 4월 9일 부산 해운대문화회관에서 80세 이상 회원들만의 공연을 가진다.

부산에서도 9988 건배사 실현하는 ‘젊은 어르신’ 점점 증가

“우리도 연예인 한번 돼보자!” 2008년 9월 창단한 아모르합창단 단원 35명 중 80세 이상 회원 12명이 오는 9일 부산 해운대문화회관 고운홀에서 특별공연을 가진다. 기업인, 주부, 교수, 언론인 등 다양한 출신의 회원 12명 연령대는 80~90세. 최고 연장자는 92세 남성. 이번 공연은 8090콘서트 성격까지 띤다. ‘부산청소년합창제 특별 초청 출연, KBS부산방송국·극동방송 출연, 박근혜 대통령 취임 2주년 기념 한마음 축제 특별 출연, 일제 강제 동원 희생자 합동 위령제 위로 공연, 부산가곡연주협의회 창립기념 공연’ 등 전국구 시니어 합창단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 중인 8090 합창단원들은 “어떻게 보면 마지막 무대랄까…”라고 운을 띄우지만, 매주 월요일 부산 신부산교회에서 공연을 준비하면서 보이는 열정과 에너지는 100세 합창제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이는 들어도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겠다는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다. 공연을 준비하는 이해원 씨는 “노래로서 ‘우리는 건강하다. 삶을 건전하게 살고 있다. 인생의 즐거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황혼이 인생의 열정을 가둘 수 없다’라고 떼창하는 공연이다. 황혼이란 해 질 녘 노을에 물든 하늘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을 뜻한다. 하지만, 어느 시인은 “황혼의 태양이 가장 밝고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남구노인복지관 난타동아리 두드림 회원들의 문화예술공연 남구노인복지관 난타동아리 두드림 회원들의 문화예술공연

난타·합창·영상제 등 황혼의 열정 곳곳에서 벌어져

부산 남구노인복지관 난타 동아리 ‘두드림’. 최근 80대 신입 2명을 포함한 15명의 회원은 매주 북을 두드리면서 액티브한 삶을 살아간다. 북을 두드리는 난타 공연의 특성상 체력적인 소모가 크지만, 어울림 회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 주간보호센터와 요양병원, 어린이집 등을 대상으로 자원봉사 공연을 펼친다.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치매를 앓는 환자들에게는 나무 숟가락을 나눠줘 공연에 참여하게 한다. 공연 중간에는 실버체조 공연도 곁들여 지겨울 시간조차 없다.

어울림에서 10년째 활동 중인 이옥자 씨는 “배운 것을 남을 위해 봉사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기쁘고, 건강해지는 기분”이라면서 “바쁘게 살기 위해 최근에는 난타 공연 봉사와 함께 수영까지 배우고 있다”라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남구노인복지관 송지원 사회복지사는 “어르신들이 봉사 자체를 굉장히 보람 있게 생각하고, 운동과 함께 친구들을 사귀는 효과가 크다”고 밝혔다. 송 복지사는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쏟아지면서 사회참여 활동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면서 “노인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어르신들도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다 많이 보여줘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남구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 회원들의 영화 촬영 장면. 남구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 회원들의 영화 촬영 장면.

‘황혼의 열정을 막는’ 장애물은 연령차별주의, 에이지즘(Ageism)

나이를 이유로 노인들을 차별하는 사회적 편견을 일컫는 말이다. 백세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노화를 평가절하하는 세상에서 자발적·비자발적 연령차별주의가 알게 모르게 내재돼 있다. “이제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에는 난 너무 늦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는 늦었다” 등 스스로에 대한 자발적 연령차별주의도 무시하기 어렵다.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새롭고 도전적인 경험과 기회를 시도하려는 자신감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성별, 인종, 계급, 빈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나이가 들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동희 노인생활과학연구소 대표는 “나이가 70~80세가 되면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연령차별주의가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면서 “이런 사회적인 시선과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한 대표는 “유럽에서는 액티브한 시니어들의 등장이 너무나 당연하다”면서 “80+, 90+, 100+ 시대가 이미 도래했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 동구 자성대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가 2023년 제13회 부산실버영상제에서 ‘우리 며느리’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부산 동구 자성대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가 2023년 제13회 부산실버영상제에서 ‘우리 며느리’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자발적·비자발적 연령차별주의를 뛰어넘는 ‘젊은 어르신’ 증가

카메라 촬영과 디지털 편집 등 새로운 기술과 연기를 배우느라 땀 흘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부산 동구 자성대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 지난해 열린 제13회 부산실버영상제에서 ‘우리 며느리’란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외국인 며느리와 함께 사는 다문화가정의 여러 에피소드를 담았다. 70대가 주류인 영상동아리 회원 7명은 영화감독과 배우, 스태프 역할을 교대로 맡으면서 영화를 제작한다.

회원들은 “TV나 영화에서 보기만 하던 배우와 감독 활동을 직접 하면서 스스로 살아있음과 자부심을 굉장히 느낀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내가 연예인, 영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라면서 “영상제 시상식에서 주변 친구와 가족의 격려와 칭찬이 큰 힘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은숙 자성대노인복지관 관장은 “개인의 경제 사정과 관계없이 재가복지서비스를 받는 어르신들이 우울감이 있다면,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분석했다. 이 관장은 “자성대노인복지관에서 실버영상제 대상을 3차례나 수상했다“면서 ”어떤 주인공 할머니는 ‘내년에도 주인공을 한번 더하고 싶다’고 찾아오시기도 한다”라고 웃음을 터트렸다.

창립 때부터 14년간 부산실버영상제 심사위원장 역할을 맡고 있는 안수근 동명대 명예교수는 “노인들이 디지털영상 촬영과 편집, 연기 등 창의적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살아온 가치 있는 삶을 다음 세대와 공감할 기회가 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안 명예교수는 “작품을 제작하고 팀워크를 이루는 과정에서 영원한 청춘이 된다”면서 “앞으로 실버영상아카데미 등 체계적인 노인 교육시스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3회 영상제 공모주제는 “세대와 공감을, 세상에 영감을”, 올해 14회는 “가치 있는 세월, 같이 있는 세대”이다.


부산 남구노인복지관 난타동아리 두드림 회원들의 자원봉사 공연. 부산 남구노인복지관 난타동아리 두드림 회원들의 자원봉사 공연.

우리 사회에서 노인에 대한 연령차별주의의 극악한 표현이 “늙으면 죽어야지”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뿐만 아니라, 노인 스스로 자신에 대해 부정적 고정관념도 극복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연령차별주의는 나이 탓만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노력해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게 만든다. 연령차별주의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노력과 자신감과 용기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한동희 대표는 “황혼이 삶의 열정을 결코 억누를 수 없다”면서 “사회적으로 80, 90세 등 노령층이 연령차별주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내 나이가 어때서’라면서 자신있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9988을 위해서.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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