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망자’였던 노숙인, 저축왕으로 ‘우뚝’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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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다 사기 당한 후 집 나가
가족 실종 신고로 사망자 등록
18년 방황 지원시설 도움에 자립

지난해 8월 금정희망의집 노숙인 입소자들이 양산부산대학병원 치과병원의 구강 청결 교육을 듣고 있다. 금정희망의집 제공 지난해 8월 금정희망의집 노숙인 입소자들이 양산부산대학병원 치과병원의 구강 청결 교육을 듣고 있다. 금정희망의집 제공

한때 서류상 망자로 등록돼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으로 여겨진 50대 노숙인(부산일보 2023년 3월 7일 자 10면 보도)이 노숙인 지원 시설 도움으로 자립에 성공, ‘저축왕’으로까지 거듭났다. 그가 18년간 노숙인으로 생활하며 겪은 아픔을 딛고, 편의점에서 성실히 일한 끝에 얻어낸 성과다.

부산시는 ‘2023년 노숙인 등 저축왕 선발 계획’에 따라 50대 이화영(가명) 씨를 저축왕으로 선발했다고 8일 밝혔다. 자활 의지가 있는 데다 일상생활에 모범적인 노숙인 등을 각 지자체가 추천했고, 그중 이 씨를 저축왕으로 선정했다. 부산시 사회복지과 관계자는 “1년간 금융기관에 저축 금액과 저축 기간, 자립계획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저축왕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씨에게는 ‘사망자’였던 과거가 있다. 학업에 뜻이 있었던 이 씨는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지인과 함께 학원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동업자에게 큰 사기를 당해 삶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가족에게 더 비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집을 뛰쳐나왔다. 가족들이 그를 찾아 사방팔방 다녔으나 행방을 알긴 어려웠다. 결국 어머니가 실종 선고를 청구하면서 이 씨는 2005년 사망자로 등록됐다. 이 씨는 노숙 생활을 시작했고 18년을 서류상 망자로 살았다.

그러다 노숙인 지원 시설인 ‘금정희망의집’이 이 씨를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금정희망의집은 그의 딱한 사연을 듣고 돕기 시작했다. 검찰청에서 사망자 회생을 도와준다는 소식을 접했고, 서류를 챙겨 곧바로 검찰청으로 향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이 씨는 금정구지역자활센터가 운영하는 편의점 직원으로 일하며 자립도 시작했다. 오랜만에 일을 했지만 힘들진 않았다. 신세를 한탄하며 머뭇거리기보다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데 집중했다. 통장에도 돈이 모였다.

금정희망의집 최주호 원장은 “이 씨가 편의점에서 일하며 지난해 3월부터 지금까지 880만 원을 저축했다”며 “돈을 벌어 생필품을 구매하고, 저축도 하며 살았다”고 전했다. 이 씨는 “잠시 인생 하강기를 걸었으나, 도움을 받아 원래 궤도로 돌아왔을 뿐”이라며 “‘성실은 인간 생활의 기본’이라는 가치관에 따라 남은 삶을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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