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소중한 타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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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정 ‘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

정혜정 ‘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정혜정 ‘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정혜정 작가의 ‘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은 2009년도에 제작한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싱글채널 비디오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7미터 가량의 길고 세밀한 드로잉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고 뫼비우스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닿아있는 느슨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풍경 속에는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 생육하는 미생물, 동식물, 인간, 비인간 등 실제로 존재불가한 퓨전 크리쳐들이 공생하고 있는데 작가는 인간의 우위성을 강요하지 않는 공생의 윤리적 풍경을 클로즈업을 배제한 객관적인 앵글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 크리쳐들은 〈동방해경표〉라는 작가의 저서에 하나하나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은 동쪽 어떤 바닷속에 빠진 ‘김려’라는 가상의 인물 시점에서 기록된 책으로, 작가인 정혜정이 역자로 등장하여 ‘김려’의 기록들과 그가 겪은 경험을 전하는 형식으로 꾸며져있다. ‘김려’가 겪은 경험들과 기록들이 84종의 상상생물들의 드로잉과 설명이 조합된 도감의 형태로 정리되어 있는 마치 21세기 〈산해경〉과 같은 책이다.

이런 상상력은 작가가 열아홉살에 스킨스쿠버다이빙을 배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였으며 물에서 느끼는 공간에 대한 감각은 생경했지만, 지상의 움직임이 ‘선’적이라면 물 속에서는 깊이라는 하나의 축이 더해지며 교차되는 경험을 한다. 물 속에 있는 동,식물도 주의깊게 관찰하였는데 육지에 비해 무게와 크기에 대해 자유로웠고, 촉각 또한 매우 다채롭고 부드러웠다. 만지면 바스라질 것 같은 것부터 뾰족하고 딱딱한 것까지 다양한 스팩트럼에서 작가는 자연의 생명체와 깊은 연결성을 깨닫는다.

5년 후 이 깨달음은 ‘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크리쳐들과 뒤얽혀 서로의 존재를 만들고 종과 종의 새로운 관계맺기를 제안하는 작가의 첫 시도이며 시간성을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물 속에 살아가는 상상생물들의 다종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작품이다.

정혜정 작가는 지금도 멸종동물로부터 출발한 리서치를 확장해 비둘기, 개, 멍게, 세포, 바다, 우주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몸-되기’라는 의지를 확장해 인간이 만든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윤리를 찾는 ‘함께 되기’ 실험들을 여전히 진행중이다.

정혜정 작가는 2009 일현 트래블 그랜트 대상을 수상했으며 ‘반디산책,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2’, ‘누구의 숲 누구의 세계, 대구미술관, 2024’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김가현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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