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역사 골목에 울려 퍼진 ‘음악 신동’ 울음소리 [세상에이런여행] ⑳
<모차르트in오스트리아 ② 잘츠부르크(상)>
시내중심가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 3층
1756년 1월 27일 새벽 모차르트 출생
레오폴트-안나 마리아 부부 7번째 아이
박물관으로 바뀐 생가 관광객에 대인기
인근 ‘모차르트카페’ 문화예술인 집결지
출생 다음날 잘츠부르크 대성당서 세례
몸 담근 침례반, 등기서류 아직도 남아
10대에 ‘대관식 미사’ 등 대성당서 연주
장크트길겐에서 태어난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페트를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생계를 위해 어머니 에바 로시나, 한 살 위의 언니 마리아 로시나와 함께 잘츠부르크로 이사를 갔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네 살 어린 아기였던 그녀가 어머니 품에 안겨 마차를 타고 간 길은 힘든 인생처럼 험한 산악의 돌길이었다.
300년 전 마차가 오갔던 울퉁불퉁한 돌길은 지금은 아스팔트로 미끈하게 포장돼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여행객을 가득 태운 버스는 에바 로시나가 두 어린 딸을 안고 고심에 빠진 채 달렸던 그 도로를 따라 잘츠부르크로 향한다.
■게트라이데가세
18세기의 안나 마리아는 꼬박 하루 정도 걸렸을 거리를 21세기의 여행객이 버스로 30분 만에 달려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구시가지와 잘자크강 사이를 따라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인 게트라이데가세였다. BC 1세기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게르만족과 로마인, 켈트족이 무역을 위해 이용한 길이라고 하니 길의 역사만 해도 2000년을 넘는다.
안나 마리아는 먹고 살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갔지만 병으로 언니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신심이 돈독했던 그녀는 늘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다 대성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작곡가 겸 연주자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레오폴트는 바이에른공국의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이었다. 제본공 길드 회장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업을 이으라는 어머니의 강요를 뿌리치고 여섯 동생마저 내팽개친 채 혼자서 성공하겠다며 잘츠부르크로 달아난 청년이었다. 그는 낯선 도시에서 음악가가 됐고 나중에는 궁정 악사로 채용됐다. 모차르트 가문의 역대 조상은 소작농이나 벽돌공, 제본공으로 일했을 뿐이어서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은 레오폴트가 처음이었다.
평민이었던 레오폴트는 안나 마리아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수년간 열애를 이어가다 1747년 11월 21일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결혼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레오폴트는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그때 기준으로는 만혼이었다. 두 사람의 자유연애와 결혼은 잘츠부르크에서는 화제를 불러 모았고 많은 청춘남녀의 부러움을 샀다.
두 사람이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향신료 무역상이던 레오폴트의 친구 로렌츠 하겐나우어가 소유한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 주택 ‘하겐나우어하우스’ 3층이었다. 3층은 부엌, 거실, 침실 하나, 작은 옷방 그리고 레오폴트의 독서실로 이뤄졌다.
게트라이데가세는 다른 곳보다 살기에 매우 편리한 시내 중심가였다. 부유한 상인, 시 행정관, 교회의 관리, 판사 등이 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역사회에서 돈이나 권력을 가진 최고 상류층이었다.
레오폴트 부부는 결혼하고 7년 동안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어릴 때 병으로 죽고 난네를로 불렸던 딸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만 살아남았다.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부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756년 1월 27일 새벽 소원을 이뤘다. 나중에 음악가가 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이날 태어난 것이었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 모차르트가 태어난 9번지 주택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골목을 걷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에 ‘Gebursthaus(생가)’라는 독일어가 새겨진 건물만 찾으면 된다. 골목길을 오가는 관광객은 너나할 것 없이 이곳에 들어가 보거나 대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생가인 데다 그의 음악 인생이 시작된 곳이며, 유럽에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발판이 된 곳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 있는 모차르트 관련 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니 만큼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겐나우어하우스는 19세기에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모차르트 기념사업을 담당하는 모차르테움재단이 1856년 이곳에서 개최한 모차르트 전시회에서 번 돈으로 아예 건물을 사들여 박물관을 만들고 모차르트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비치한 것이었다. 악기, 악보, 모차르트 가족이 사용하던 가구는 물론 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등 자료는 다양하다.
재단은 해마다 1월 모차르트의 생일이 다가오면 ‘모차르트 주간’을 선정해 1주일 동안 각종 콘서트를 개최한다. 8월에 열리는 잘츠부르크 축제 기간 중에도 마찬가지다. 이때 모차르트 생가에 가면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즐길 수 있다.
모차르트 생가를 꼼꼼히 둘러본 뒤 피로를 달랠 겸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간다.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생가 바로 앞에 딱 어울리는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이름을 붙인 ‘모차르트카페’가 바로 그곳이다. 모차르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가게이지만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는 잘츠부르크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모차르트 카페는 1923년 10월 6일 문을 열어 지난해에 개업 100년이었다. 이 카페가 개장하자 많은 예술가가 모여 커피를 즐겼고 음악 연주회, 토론회, 문학 낭송회 같은 행사를 자주 열었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잘츠부르크 대성당
게트라이데가세에는 빈틈이라고는 하나 없이 건물이 가득하다. 100년 전만 해도 이곳 건물 대부분은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상점으로 변했다. 1970~1980년대 잘츠부르크가 관광지로 떠올라 외국인이 몰려든 게 계기였다. 잘츠부르크 시청은 골목길의 옛 모습을 유지해 정체성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상업화의 바람을 막을 수 없었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건물의 정면에 붙은 특이한 연철 간판이다. 놀라운 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골목이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 넉넉잡아 100개는 넘어 보인다. 간판은 옛날 건물 주인이 어떤 종류의 길드에 속했는지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모차르트 카페에서 나와 건물 사이 작은 골목길을 지나 5분 거리인 잘츠부르크 대성당으로 향한다. 268년 전인 1756년 1월 28일 아침에도 모차르트 생가에서 대성당으로 걸어간 젊은 부부가 있었다. 바로 레오폴트와 안나 마리아였다. 두 사람은 전날 밤늦게 태어나 이제 겨우 하루 된 어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안고 있었다. 부부가 이른 아침에 모차르트를 데리고 게트라이데가세에서 걸어서 대성당에 간 것은 유아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다.
성 베르길리우스가 잘츠부르크를 재건한 성 루프레흐트를 기리기 위해 8세기에 만든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지역 시민의 종교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의 중심지였다. 그것은 안나 마리아-레오폴트 부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부부는 1747년 11월 21일 대성당에서 결혼했고, 일요일마다 반드시 미사에 참석해 기도를 드렸고,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찾아가 하느님의 가호를 빌었다. 난네를은 물론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다섯 아이의 유아 세례도 이곳에서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잘츠부르크 대성당 정면에는 조각상 4개가 나란히 서서 대성당에 들어오거나 주변을 오가는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인 성 루프레흐트와 대성당을 세운 성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기독교 기초를 세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였다.
모차르트의 유아 세례식은 출생 열네 시간 만에 거행됐다. 정확하게는 1756년 1월 28일 오전 10시였다. 아기의 대부인 상인 요하네스 테오필루스 페르그마이어, 부부가 세를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인 요한 로렌츠 하겐나우어 부부와 이제 열 살인 아들 카예탄 루프레흐트 하겐나우어가 세례식에 손님으로 참석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둘러보면 1311년에 청동으로 만든 침례반이 보인다. 모차르트가 유아 세례를 받을 때 몸을 담가 세례를 받은 도구다. 모차르트뿐 아니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많은 아기가 이 침례반에 몸을 담가 세례를 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럴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가사를 만든 작사가 요셉 모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것은 1792년 12월 11일이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고 36년 뒤였다.
모차르트 세례의 흔적은 세례 기록을 담은 등기서류에도 남았다. 기록을 남긴 사람은 당시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행정 담당 신부 레오폴트 람프레흐트였다. 서류에는 모차르트의 이름이 그리스식으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고 기록됐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4~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은 모차르트와 같은 1월 27일이었는데 이날은 그의 축일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생일과 비슷한 날짜의 축일을 가진 기독교 성인의 이름을 세례 때 붙여 주는 게 관례였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볼프강우스는 모차르트 외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달리는 늑대’라는 뜻이었는데 독일어로 바꾸면 볼프강이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이후 가족이 일상적으로 부르던 이름은 볼프강이었다. 테오필루스는 대부인 요하네스 테오필루스 페르그마이어에게서 얻은 이름이었다. 독일어로는 고틀리에브, 라틴어로는 아마데우스였다. 테오필루스, 고틀리에브, 아마데우스의 뜻은 모두 ‘신의 사랑’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볼프강오 아마데오라고 부르곤 했다.
모차르트는 열여섯 살이던 1771년 잘츠부르크 궁정 악사로 취업했다. 1779년에는 오르가니스트로 승격됐는데,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음악을 책임지는 게 주요 임무였다. 대성당에서 연주할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물론 대성당의 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거나 대성당 합창단 소년들을 가르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남긴 최고 유산은 ‘대관식 미사 C장조’였다. 이 곡은 1779년 4월 4일 대성당에서 거행된 부활절 미사에서 초연됐다. 이날 대성당 신도석에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관식 미사’를 들은 신도들은 하염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곡이 정말 웅장해 나중에 여러 황제, 국왕의 대관식 때 사용됐기 때문에 ‘대관식 미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는 음반이나 유튜브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직접 연주장에서 듣기는 쉽지 않다. 곡을 직접 경청하고 싶다면 날짜를 잘 골라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관식 미사’를 연주한다. 물론 무료는 아니다. 입장권을 사야 한다.
좌석에 앉아 두 눈을 감으면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가슴에서 갑자기 신앙심이 솟아나오는 기적을 경험할지 모른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만큼 위대하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에는 오르간 다섯 대가 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살 때 늘 연주했던 오르간이었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알프스 북부에서 오르간 다섯 대를 가진 성당은 하나도 없다”면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웅장한 오르간을 보면 그들의 자부심은 납득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이 좋으면 무료나 유료로 오르간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다. 일요일 미사나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수시로 오르간이 연주된다. 물론 연주되는 곡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