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 열연 쏟아 낸 ‘행복의 나라’…2% 아쉬운 완성도 [경건한 주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에 맞아 암살당합니다. 김 부장은 재판에 넘겨지고, 그를 변호하기 위한 변호인단이 꾸려집니다.
암살 작전에 가담했던 인물 중엔 김재규의 수행비서관이던 박흥주 육군 대령도 있었습니다. 법정에 서게 된 피고 중 유일하게 현직 군인이었던 박 대령은 단심제로 끝나버리는 군사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없는 박 대령의 재판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이 바로 14일 개봉한 ‘행복의 나라’입니다.
‘행복의 나라’는 국내 관객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이 10·26사태 이후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또 인기 배우 조정석이 주연을 맡았고, 지난해 세상을 떠난 배우 이선균의 유작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화는 속전속결로 끝났던 박흥주 대령의 군사재판을 모티브로 삼긴 했지만, 현대사를 고증하는 것보다는 영화적 상상력을 펼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박흥주 대령을 상징하는 인물인 박태주(이선균)와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정인후(조정석)입니다. 인후는 실제로 박 대령 변호를 맡았던 태윤기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을 모티브로 하긴 하지만, 특정한 실존 인물을 상징하지는 않는 상상 속 캐릭터입니다.
인후는 정의로운 변호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재판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의뢰인에게 거짓 진술까지 유도해내는 속물 중에 속물이고, 그만큼 승소율도 좋습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는 평소의 인후라면 박 대통령 시해 사건 피고인의 변호 따위는 맡지 않겠지만, 사정상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변호인단에 합류하게 됩니다.
인후가 변호해야 하는 태주는 꼿꼿한 ‘참 군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나치게 고지식한 캐릭터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인 인후와 맞을 리가 없습니다.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내기 위해 인후가 제시한 편법적인 전략을 양심과 신념, 군인 정신을 이유로 거절합니다. 인후는 그런 태주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고, 변호인단과도 수시로 갈등을 빚습니다.
‘원맨쇼’ 가까운 조정석 열연…이선균도 존재감
영화는 실존인물인 태주보다는 인후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가난한 속물 변호사 인후가 재판 과정에서 불공정을 목도하고 태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참 변호사’가 되는 성장 스토리가 핵심입니다. 영화를 끌고 가는 힘도 인후를 연기한 조정석의 열연에서 나옵니다.
충동적이고 저돌적인 인후는 주연배우가 열연을 펼치기 딱 좋은 캐릭터입니다. 태주는 물론이고 선배 변호사, 검찰, 판사 등 여러 인물과 대립하며 펼치는 폭발적인 감정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모티브로 삼은 인물인 전상두(유재명)를 상대하는 장면들입니다. 유재명의 카리스마가 조정석의 패기와 맞붙으며 강렬한 스파크가 튑니다.
지난해 말 개봉한 ‘서울의 봄’ 속 인물들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환과 유재명이 연기한 전두환, 이성민 버전의 정승화 참모총장과 정진우 버전의 참모총장이 제각각 매력이 있습니다.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이선균의 호연도 일품이었습니다. 박태주는 ‘서울의 봄’ 속 이태신처럼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캐릭터인데, 이선균의 결연한 표정 연기가 인물 특징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영화는 톰 크루즈 주연의 ‘어 퓨 굿 맨’(1992)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정의보다 실리를 추구하던 젊은 군법무관 대니얼 캐피(톰 크루즈)를 주인공으로 합니다. 캐피는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랐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사병들의 변호를 맡으며 진짜 변호사로 성장합니다. 사병들이 단지 명령에 따랐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붓는 톰 크루즈의 열연이 관람 포인트입니다.
‘행복의 나라’에서도 박 대령이 내란에 가담한 인물인지, 아니면 단지 명령에 따른 군인인지가 핵심 쟁점입니다. 법정에서 펼쳐지는 변호사와 검사의 첨예한 논리 싸움, 그리고 편파적인 재판부에 분노를 쏟아내는 인후의 모습에서 ‘어 퓨 굿 맨’ 속 장면들이 살짝 오버랩됩니다.
신파·클리셰 없지는 않지만…이 정도면 ‘OK’
다만 ‘행복의 나라’에서 ‘어 퓨 굿 맨’과 같은 치열한 법정 공방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는 휴머니즘과 드라마에 초점을 맞춥니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태주와 인후가 공통 분모를 찾으며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리면서 사람 냄새를 풍깁니다. 정치 군인들의 악취 나는 권력욕과 대비되는 이 사람 냄새는 결국 인본주의라는 메시지를 역설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완급 조절입니다. 신파적 요소를 덜어내 힘을 빼고 좀 더 담백하게 연출했다면 어땠을까요. 특히 영화 중반부 이후에는 감정이나 상황이나 모두 과잉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후는 늘 흥분 상태입니다. 잔뜩 화가 나 있거나 울분을 토하거나 눈물을 애써 참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처절하고 비참한 상황으로 인후를 몰고 가는 장면들은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들이 비현실적이고,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음악을 다소 과하게 사용하는 등 클리셰로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신파적 요소가 몰입을 크게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혼신을 다한 조정석의 연기에서 설득력이 나오기도 합니다. 또 감정이 과잉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술 점수는 높게 평가할 관객이 많을 겁니다. 시대에 맞는 의상과 소품이 정교하게 배치됐습니다. 70년대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나모픽 렌즈’라는 특수 렌즈로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장면에서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한국 영화 고질병은 여전했습니다.
영화 제목인 ‘행복의 나라’는 군사정권 시절 금지곡으로 지정된 포크 가수 한대수의 대표곡 ‘행복의 나라로’에서 착안했습니다. 권력을 좇는 야욕 앞에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가운데 들리는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는 가사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먹먹한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