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퇴근 후 연결 차단권
대만 반도체 회사 TSMC 엔지니어가 잠결에 회사 전화를 받고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한다. “한밤중에 어딜 가요?” “반도체 설비가 고장 나 수리하러 가야 돼요.” 아내는 안쓰러워하면서 남편의 출근을 돕는다. TSMC가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짓기로 하자 문화 차이 탓에 안착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에 인용되던 사례다.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반도체 공장에서 야간에 고장이 발생하면 미국은 이튿날까지 공정이 중단되지만 대만은 퇴근했던 엔지니어가 달려온다. 대만이 반도체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 ‘회사 우선’의 직장 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서구와 단적으로 대비되는 대목이다.
영국 노동당 정부가 노동개혁 일환으로 칼퇴근을 들고 나왔다. 퇴근 후 업무 중단권이 핵심이다. 업무 시간 외 메일이나 문자, SNS 메시지를 차단할 권리, 이른바 ‘전원을 끌 권리’(right to switch off)를 고용 계약에서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미 아일랜드와 벨기에에서 의무화된 ‘연결 차단권’(right to disconnect)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20일 고용주가 퇴근 후 업무 지시를 반복해서 고용심판원에 제소될 경우 “수천 파운드(우리 돈 수백만 원)를 보상금으로 물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야당인 보수당은 생산성 효과가 의문스러운데 기업에 부담만 준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박홍배 국회의원은 근무 시간 외에 전화·문자·카카오톡·텔레그램 등을 이용한 업무 지시를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최근 대표발의했다. 박 의원은 “평일 저녁과 주말·공휴일 업무 지시는 사생활 침해이며, 추가 근무로 피로가 누적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 직장인 60.5%가 ‘퇴근 후 카톡 지시’를 받고 있고, 자택과 카페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비율도 24.1%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앞선 21대 국회에서 ‘연결 차단권’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회기를 넘겨 모두 폐기됐다. 업종과 직무별로 업무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 금지는 과도한 규제라는 반대 논리를 넘지 못해서다. 하지만 단체협약으로 ‘차단권’을 도입하는 기업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과 가정의 양립, 사생활 보호는 거스르기 힘든 시대적 추세다. 전면 규제 대신 적용 가능한 분야에서 시범 실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 점진적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