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사망 마지막 존엄 '공공 유언장'으로 보장 [연결:다시 쓰는 무연고자의 결말]
부산 동구청 '해피엔딩 장례' 주목
주민, 법적 요건 따라 유언장 작성
사망 후 재산 등 원하는 대로 이행
공공이 사후 결정권 보장 첫 사례
일본은 공공 유언장 보관소 운영
28일 부산 동구보훈회관에서 열린 ‘해피엔딩 장례 지원사업’ 참여자들이 유언교육을 받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유언은 무연고 사망 이후 장례 주관 의사와 재산 처리 등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줄이는 대안으로 꼽힌다. 그러나 국내에서 유언은 온전히 민간에 맡겨져 있어, 개개인이 요건을 갖춘 유언을 작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다.
■내가 정한 내 사후, 지자체가 ‘연결’
“이름, 연월일, 주소와 날인. 이 네 가지는 꼭 작성하셔야 합니다.”
28일 오후 2시께 부산 동구보훈회관 강단에 선 이주언 공익변호사가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의 필수 요소를 강조해 말하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종이에 내용을 받아 적었다. 20명 남짓 모인 참석자들의 연령대는 5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했다. 그 누구도 당장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가족과 연이 끊기거나 가족이 없는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해 생전 의사를 효과적으로 남기는 방법을 알고자 모인 이들이었다.
평소 자신의 사후 처리에 관한 의사를 쪽지에 적어 지니고 다니던 쪽방 주민 이주형 씨(부산일보 7월 31일 자 12면)도 이날 교육에 참여했다. 그는 “모아둔 돈의 규모와 그 돈이 쓰였으면 하는 곳 등을 적어서 갖고 다니는 정도였는데 유언으로 남기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구청 ‘해피엔딩 장례’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민법 요건에 맞춰 유언장 작성하는 법 등이 안내됐다. 이 변호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목소리와 글로 중요한 생각을 남긴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며 “재산 분할 대상과 비율, 기부 의사 등은 유언으로 남겨야 사후에 이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연고 사망자의 재산은 상속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재산을 손댈 권한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 방치되곤 했다. 복지시설에 거주하다 사망한 무연고자에 대해서는 재산 처리 지침이 마련돼 있지만, 상속자가 없는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엔 입법 공백 상태였다. 상속자가 없는 무연고 사망자의 재산을 처리하려면 상속재산 관리인 선임 청구 등 2년 이상 걸리는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고, 지자체도 행정적 부담에 방치해 두는 게 현실이다.
동구청은 ‘해피엔딩 장례’ 참여자의 유언 작성 여부를 관리해 유언 효력이 발생되지 못할 우려를 최소화했다. 무연고 사망자의 사후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해 공공이 나선 첫 사례다.
김진홍 동구청장은 “홀로 계신 어르신들이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를 느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업을 마련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사후 자기결정권, 일본은 공공이 나선다
국내에선 유언을 남기는 것부터 시작해 사망 후에 유언장을 유언 집행자에게 전달하고, 실제 집행하기까지 전 과정은 오로지 민간 영역에 맡겨져 있다. 금융권의 유언대용신탁도 각광받고 있지만, 최저 신탁 금액이 높아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다.
한국보다 먼저 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은 2020년 7월부터 국가가 직접 유언장 보관소를 운영한다. 상속 분쟁이 빈발하자 사회적 혼란을 줄이기 위해 도입됐는데, 유언에 대한 사회적 문턱을 낮춘 시도로 평가 받는다.
29일 일본 법무성 민사국에 따르면 일본 전역에 설치된 312개 유언장 보관소에 올 7월까지 총 7만 9128건의 유언장이 보관됐다. 유언장 보관소는 자필증서에 의해 작성된 유언만 취급한다. 자필로 작성한 유언장을 유언자가 들고 오면, 보관소 직원은 유언장이 요건을 갖췄는지 확인한다. 유언자가 사망하면 사망 정보가 보관소로 전달되고, 유언장 보관 사실이 미리 지정된 사람에게 통지된다. 유언자는 유언장을 맡기면서 사망 후 유언장 보관 사실을 알릴 사람 3명을 지정할 수 있다. 유언장 원본은 유언자 사망 후 50년간, 이미지 데이터는 사망 후 150년 간 보관한다.
수수료는 겨우 3900엔(한화 약 3만 6000원). 유언 집행 전 유언장의 법적 효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가정법원의 검인 또한 불필요하다. 보관소에 맡긴 뒤 도중에 수정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열람 후 수정한 다음 다시 맡길 수 있다.
유언장의 멸실이나 누락 우려가 없고, 법적 요건을 갖췄는지 접수 단계에서 확인하는 만큼 사후 자기결정권이 안정적으로 보장된다. 법무성이 발간한 가이드북을 통해 유언 작성과 보관소 이용에 대해 꼼꼼한 가이드라인도 제공한다.
일본 법무성 민사국 상사과 관계자는 “자필 유언은 발견되지 않거나, 누락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태어난 제도”라며 “이용 수수료가 저렴해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손혜림·히라야마 나루미 서일본신문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