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0권 완독도… K문학에 일본이 뜨겁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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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일어판 완간 축하
일본 팬, 작가 고향 통영 찾아
번역가도 스타급 예우 ‘눈길’

19일 경남 통영 박경리 작가 묘소 앞에서 ‘토지’ 일본어판 20권 완간을 기념해 헌정식이 열리고 있다. 19일 경남 통영 박경리 작가 묘소 앞에서 ‘토지’ 일본어판 20권 완간을 기념해 헌정식이 열리고 있다.

“지난 화요일에 <토지> 20권 전권을 완독했다. 그래서 지금 제 머리는 밤새도록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소설 토지는 1945년 8월 15일이 마지막 장면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토지는 일본의 독자에게 그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으로 토지 연구회를 만들어 그 의미를 찾고자 한다.” 19일 경남 통영 거북선호텔에서 열린 토지 일본어판 완역기념회에서 일본 독자 야마오카 미키로 씨가 한 이야기다. 그는 일본의 한국 문학 전문 쿠온출판사가 <토지> 일본어판 전 20권 완간을 기념해 마련한 출판기념회 겸 문학기행에 자비를 들여 참가한 일본 독자단 30명의 일원이다.

토지는 박경리 작가가 1969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 무려 26년이 걸렸다.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4만여 장 분량. 일본어 출간도 2014년에 시작해 완간까지 꼬박 10년의 세월이 소요됐다. 사실 토지 전권을 다 읽은 독자는 한국에도 흔치 않다. 지난달 30일에 일본에서 완간 출간된 토지는 최근 K문학의 바람을 타고 벌써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다음 순서로 나선 오오츠카 게이코 씨도 “8년 전에 쿠온출판사의 문학기행 차 통영을 방문했을 때 토지 1권을 읽기 시작해, 이번에 오기 전에 20권을 다 읽었다. 토지는 많은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려 줬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가르쳐 줬다. 앞으로도 토지를 옆에 두고 계속 읽겠다”라고 말했다.


19일 경남 통영 박경리 작가 묘소 앞에서 일본 독자들이 ‘토지’ 일본어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19일 경남 통영 박경리 작가 묘소 앞에서 일본 독자들이 ‘토지’ 일본어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선배 작가 박경리를 흠모하는 여러 후배 작가도 참석했다. 공지영 작가는 “선생은 사위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뒤 미뤄뒀던 역사소설 토지를 쓰기로 결심하고 원주로 이주했다. 여성 소설가가 처음하는 이 시도가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책상 앞에 일부러 재봉틀을 놓아두었다. 선생은 토지가 실패하면 재봉틀로 밥을 벌어먹겠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했다. 대신 글만큼은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라고 전했다.

이날 특히 이채로웠던 점은 공동번역가 시미즈 치사코·요시카와 나기 씨, 편집자 후지이 히사코 씨를 행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모습이었다. 시미즈 치사코 씨는 “과연 일본 독자들이 토지를 읽고 식민 지배하에 있던 한국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적어도 20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으려고 한 사람이라면 수탈과 억압을 당한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공동번역가 요시카와 나기 씨는 “다음 책은 언제 나와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토지를 다 출판해 달라고 전화를 걸어오는 독자가 많았다. 그분들이 건강하게 살아서 20권까지 모두 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들 번역가들과 편집자에게 독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각각 20개씩의 꽃다발을 전달했다. 이들 덕분에 토지가 20번(권)이나 꽃을 피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번역가와 편집자가 스타 대접을 받는 낯선 분위기가 훈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토지를 사랑하는 한국과 일본 독자들이 노래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 K문학의 놀라운 힘이었다.


토지를 공동 번역한 시미즈 치사코·요시카와 나기 씨, 편집자 후지이 히사코 씨(왼쪽부터)가 꽃다발에 파묻혀 있다. 토지를 공동 번역한 시미즈 치사코·요시카와 나기 씨, 편집자 후지이 히사코 씨(왼쪽부터)가 꽃다발에 파묻혀 있다.

김승복 대표가 설립한 쿠온출판사가 2010년에 처음 낸 한국 문학 서적이 <채식주의자>였다. 그 뒤에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등을 냈다. 이들 책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지금 일본에서도 없어서 못 파는 실정이라고 한다. <채식주의자>는 일단 2만 부를 목표로 중쇄 계획에 들어갔다. 쿠온출판사는 지난달 한글날 기념 세종문화상 국제문화교류 부문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김 대표는 “한국 문학의 정수를 일본에 선보이려고 했을 때 첫 자리는 늘 한강이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한강 작품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 저변 전체를 넓힐 엄청난 기회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K문학의 바탕은 역시나 좋은 번역에 있었다. 한국 문학의 저력을 확인하는, 책 읽기 좋은 가을이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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