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아주 보통의 하루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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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영 사회부 차장

내년 트렌드 키워드로 꼽히는 '아보하'
'소확행'도 사치가 된 팍팍한 현실 속
갑작스러운 대통령 계엄 선포에 혼란
평온한 국민 일상 지키는 게 정부 역할

2025년의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가 꼽힌다. 2018년 트렌드 키워드였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이젠 사치가 돼 버린 모양이다. 치열한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은 작은 행복이 아닌, 그저 평안한 하루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주 행복하지도 않고,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무난한 일상에 가치를 두는 태도가 ‘아보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보다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는 젊은 세대의 좌절이 반영된 트렌드로 분석되기도 한다.


경제가 어렵고 사는 게 팍팍해도 큰 탈 없이 올 한 해를 잘 버텼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12월의 어느 밤. 믿기 힘든 뉴스 속보가 전해졌다. 처음엔 기자들도 가짜 뉴스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3일 오후 10시 30분께 갑작스럽게 전해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은 국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어 놨다.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와 SNS 메시지가 쏟아졌고, 불안한 마음에 귀가를 서두르는 시민들도 생겨났다. 혼란 속에 뉴스나 게시물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한때 접속 오류를 빚기도 했다. 1979년 이후 45년 만의 계엄 선포에 대다수 시민들은 ‘1970년대로 돌아간 거냐’ ‘황당하다’ ‘무섭다’는 반응을 보였다. 천만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뉴스를 통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이게 과연 2024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하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국회 관계자, 시민들의 대치를 지켜보며 자칫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직장인과 학부모들은 출근과 등교는 어떻게 되는 건가 밤잠을 설쳐야 했다.

계엄 선포 후 원화 가치와 비트코인이 급락하는 등 금융 시장도 요동쳤다. 야간 거래에서 원·달러 환율이 한때 1440원을 돌파했고, 코스피 200 야간선물옵션도 5% 이상 하락했다. 코인에 투자한 한 지인은 “그렇지 않아도 경제난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대체 정부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4일 오전 1시께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고, 행정이 정상화 수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온라인 기사를 쏟아내던 기자들도 한숨을 돌렸다. 부산시는 비상소집을 해제했고, 부산시교육청도 교육부로부터 학사 일정 정상 운영 통보를 받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의 계엄 해제 발표는 이날 오전 4시 30분께야 이뤄졌다.

시민들은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각자의 소중한 일상을 빼앗겼다. 계엄 선포 후 편의점에서는 통조림, 봉지면, 생수와 햇반 같은 생필품 매출이 급증했다고 한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때나 볼 법한 사재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상 초유의 계엄령 사태는 연말 분위기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뉴스를 보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는 또 다른 지인은 “밤새 불안에 시달리다 출근길 새벽배송 기사님을 보고 서야 ‘아, 별일 없는 하루가 시작됐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며 “계엄령에 놀란 가슴을 새벽배송으로 위안 받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마지막 달, 여전히 ‘보통의 하루’를 되찾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135금성호 침몰 사고 후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10명의 실종자, 중대재해로 스러져 끝내 귀가하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 이들의 가족과 주변인의 한숨과 절망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국가배상소송을 진행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최근 법무부가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올해도 결국 소송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재판 결과를 확인하지 못하고 지병 등의 이유로 숨진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최근 1년 사이 6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는 것, 그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의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는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걸까. 난데없는 계엄령 선포에도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보루인 국회가 그나마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극한에 달한 여야 대립에 지쳐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 했던 일부 국민들도 밤새 SNS로 뉴스와 의견을 공유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언론 통제 시도에 맞섰다. 비상계엄이 뭔지 공부해 가며 절차적 문제점을 꼬집고 나선 사람, 한밤중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도 있었다. 권력에 대한 시민 견제와 감시, 정치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도, 평범한 일상도 지킬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한 6시간의 계엄 사태. 아주 보통의 하루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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