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내재성, 생명
■정정엽 'red bean-bird'
정정엽(b. 1962)은 여성과 생명 그리고 공존하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회화·설치·퍼포먼스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작가는 80년대 대학 졸업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두렁’, ‘입김’ 등에서 활동하며 첫 개인전으로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을 열었으며, 두 번째 전시(1998)에서 붉은 팥과 곡식 작업을 처음 선보이면 그 이후로도 팥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자루에 담긴 곡식으로부터 출발한 이 연작은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 속 모습을 하나의 작은 점으로 보고 이들 점이 모여 힘이 생기기도 하고 또 흩어져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정엽의 곡식 연작은 팥, 콩, 녹두 등 곡식 낱알이 품고 있는 에너지와 씨앗이자 열매가 지닌 생명력을 보여준다.
특히 ‘red bean-bird’는 정정엽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 소재인 ‘붉은 팥’을 통해 생명력과 함께 자연을 표상하고 있다. 붉은색 유화물감을 세필로 투명하고 맑게 둥굴려 한 알, 한 알 팥을 수만 개 밀도 있게 그렸다. 수만 개 팥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새 형상이 드러난다. 새 형상은 부산현대미술관이 위치한 철새도래지 을숙도라는 지정학적인 특이점과 더불어 미술관에서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자연과 환경이라는 주요 의제와도 맞닿아 있다. 한편 강렬하게 쏟아지는 붉은 팥이 그려진 캔버스는 작가가 체화한 노동과 시간의 기록이자, 결실이기도 하다.
정정엽은 곡식 그 자체가 지닌 고유의 빛깔과 타고난 생기를 잃지 않는 모습을 통해 여성과 생명이 공존하는 삶에 주목한다. 씨앗 한알 한알에는 생명이라는 우주를 담고 있다. 또한 이들 씨앗은 대지를 떠올리게 하며 공동체적 결속과 연대를 싹틔운다. 무심히 지나치는 곡식 한 알이 어디서 왔는지 다시금 질문해 본다면 표면 자체에는 드러나지 않는 농사 짓는 이의 노고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고 살림을 꾸리는 노동을 향한 헌사가 흐른다. 우리의 밥상에 오르기 전, 땅에서 나왔을 열매를 어여쁘게 어루만지는 농사를 짓는 이의 시선은 음식이기 이전에 자연을 떠올리게끔 한다. 이는 상호 의존성과 연관성을 발견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둘러싼 생활과 노동의 모든 부분이 일상의 정치라는 의식을 깨우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김소슬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