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당신은 살아남지 못했어… 진보 이후의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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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 '세상이 아닌 모든 것'

DIS '세상이 아닌 모든 것'. 싱글 채널 HD 비디오 중 한 장면.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DIS '세상이 아닌 모든 것'. 싱글 채널 HD 비디오 중 한 장면.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DIS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및 경기 침체의 여파로 2010년 결성된 아티스트 콜렉티브 그룹으로, 기술 자본주의 세계의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미술, 큐레이팅, 이론, 광고, 패션, 시장, 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지는 그들의 활동은 예술, 상업, 교육, 공공의 영역을 포괄함은 물론, 다양한 매체와 형식, 미디어 플랫폼을 수용함으로써 예술 생산과 보급 등 자본주의 시대 예술 실천의 새로운 형태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시도한다.

사이-파이 다큐멘터리 작품 ‘세상이 아닌 모든 것’은 트랜스-아포칼립스(Trans-Apocalypse) 관점에서 인간 종의 자연사를 비선형적으로 기술하며 새로운 시각에서 인간 존재와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작품 전반의 종말론적 징후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기보다 이미 끝장났다거나 언제든 끝장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우리 시대의 뒤틀린 종말론이 우리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이 극단적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팽창을 유발하고, 이들의 기술적, 환경적, 정치적 얽힘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이 아닌 모든 것’은 선사 시대, 중세, 제국 식민주의, 산업·기술 혁명 시대까지 거대한 인간 문명사를 오가며 자본 축적을 위한 억압과 지배가 중심이 되었던 현대 사회에서 소유와 진보 개념이 어떻게 붕괴하는지 기술한다. 그러나 이 서사는 자연의 가장 자연스럽지 못한 존재로서 인간 종의 미약함에 관해 들려주는 정체불명의 팟캐스트 진행자, 폐허가 된 세계를 부유하는 화석화된 초기 인간, ‘화석이 되는 방법’이라는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멸종 퇴치 애호 유튜버, 소유 개념과 정당방위법의 차별적 적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인권 변호사, 피식민자들의 계급 투쟁과 분열의 역사를 역설하는 중세 성 투어 가이드, 시간 공포증에 사로잡힌 채 존재론적 불평등을 토로하는 드라이브스루 노동자가 쏟아내는 단편적인 일화들을 통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이들 에피소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작품 구성은 오늘날 우리가 미디어를 소비하는 관습적인 태도, 그리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린 이 세계의 단상을 지적한다.

종말에서 생존에 관한 시나리오를 다시 상상하는 이 작품은 서구 근대 계몽주의적 존재론, 선형적 시간, 보편 역사와 지식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진보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진보란, 회복의 순간들로 점철된 변화와 혁명의 이야기이고, 이때 시간은 정치적인 도전이 된다.

김태인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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