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순신의 부산포해전은 두 차례 있었다
장순복 부산관광협회 부회장·대륙항공여행사 대표
제426주기 충무공 이순신 기신재(忌晨齋)가 12월 19일 오전 11시 경남 통영시 당동의 착량묘(鑿梁廟)에서 열렸다. 착량묘는 이순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해마다 1598년 11월 19일(음력)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날을 기려 재단법인통영충렬사가 기신재를 봉행하고 있다.
평민 출신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상륙 전쟁을 일으켰다. 1592년 4월부터 1598년 11월까지의 ‘7년 전쟁’을 일본은 ‘분로쿠 게이초의 역’, 중국은 ‘항왜원조전쟁’, 우리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이라 부르고 있다.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 소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미몽(迷夢)을 깨뜨렸으며 조선왕조 멸망의 분위기를 일소하고 백성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일본 해군의 군신(軍神)으로 부활한 이순신의 해전사는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고 나서부터 23전 23승으로 굳어지고 있다. 순천향대 제장명 교수는 45전 40승 5무승부, 영남이순신연구소 박갑로 소장은 60여 회로 주장하고 있다.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은 두 차례 있었다. 1차는 1592년 8월 28일부터 9월 1일까지이며, 2차는 1597년 2월 10일부터 12일까지이다.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우부승지 김흥미에게 이순신을 잡아 오라는 전교를 내린다.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오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대역죄인이 된 이순신은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부산포를 공략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균의 장계가 실려 있다. 통제사가 탄 배가 적진 가까이 갔는데 배 밑창이 땅에 닿아 병사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 안골포만호 우수가 이순신을 구원했다. 안골포, 가덕도 두 곳에서의 접전은 패전하였으니 죄를 추궁하여야 한다고 적고 있다. 도원수 권율의 장계는 이순신 함대와 함께 출전한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보고서를 토대로 쓰였다. 부산포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요시와 함께 가토 기요마사를 부산으로 유인해 참살한다는 밀약을 맺었다는 보고서가 황당하지만 아뢴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차 부산포해전 기준 이순신 함대의 수가 2월 20일은 200여 척, 2월 23일은 63척으로 기록돼 있다. 63척은 실제로 싸우는 대형전함 즉 판옥선 숫자이며 200여 척은 중선과 소선을 망라한 숫자로 보인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쓰였다. 안타깝게도 2차 부산포 해전 상황을 알 수 있는 1597년 1월 1일부터 3월 30일까지의 일기가 남아있지 않다. 우수영명량대첩기념관, 진도타워에 있는 기념관, 완도묘당도에 있는 이순신기념관 등 그 어느 곳도 제2차 부산포 해전을 안내하지 않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부산포 해전 승전지 북항에 공원과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부산왜관, 조선통신사, 문위행의 역사를 아우르는 미디어 영상관이 만들어지면 부산의 또 다른 관광 콘텐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