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심판'이 사라진 나라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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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국 정치부 차장

'심판' 노릇 내려놓은 사법부 비웃듯
너나없이 헌법소원에 재판지연 전략
나비효과로 야기된 피해는 국민에게

따지고 보면 극단으로 치닫는 여야 갈등은 사법부 탓이 크다. 일례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도입해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만 해도 그렇다. 대법원장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겠다던 이 제도는 결국 법원 간부 인기투표로 전락했다. 법원장이 법관에게 재판 독촉 한마디 못 하는 사이 판결문 하나에 목을 맨 법률 서비스 이용자는 숨이 넘어간다.


특히나, 정치권 인사가 연루된 송사는 재판 지연이 변수가 아닌 상수다. 그 폐해는 이번 정부 들어 더 심해졌다. 모든 정치권의 관심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수사와 재판 스케줄에 집중됐다. 의정 활동은 팽개친 채 어떻게 하면 사법부의 호흡을 빠르게 할 것인지, 느리게 할 것인지에 여당과 야당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지난달 윤미향 전 의원의 선고가 있었다. 대법원은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윤 전 의원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기소 이후 4년 2개월이 걸린 법원의 판단이다. 이미 윤 전 의원은 지난 4월 국회의원 임기를 모두 마쳤다. 국회의원이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는데 임기를 끝내고 7개월이 지나서야 단죄가 내려졌다는 이야기다.

이달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도 징역 2년 확정 선고를 받고 수감됐다. 2019년 12월 기소된 입시 비리 혐의에 법원은 만 5년 만에 결론 내렸다. 공범 격인 배우자가 먼저 형기를 다 마치고 구치소 면회를 오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졌다. 1심과 2심 유죄 선고에도 법정구속을 면한 조 대표는 당을 차려 지난 총선에서 비례로 12석을 얻었다. 금정구청장 보궐 선거에서는 후보까지 냈다. 입시 비리로 수감되면서 구치소 앞에서 시국선언을 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국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사법부에 조소를 보내는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 조직이든, 운동 경기든 사람 있는 곳이면 시비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준엄한 손짓 한 번에 선수는 고개를 숙이고 경기는 재개된다. 심판이란 그런 존재다. 하지만 법원이 재판을 내려놓자 나라에 ‘심판’이 사라졌다.

극한의 정치적 대치 속에서도 사법부의 결정만은 늘 존중받아 왔다. 법원의 판단이 내려지면 예외 없이 고개를 숙였고, 후속 조치가 이어졌다. 사회적 갈등은 빠르게 중재됐다. 지지 정당을 떠나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존재했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는 법원 앞 집회가 연례행사다. 무력시위가 있고 난 후에는 재판이 늘어지기 일쑤였다. 사법 시스템이 스스로 그 권위를 내려놨다는 냉소가 나오는 까닭이다. 지연된 숱한 재판의 나비효과는 사회 곳곳에서 태풍이 되어 민생을 덮쳤다.

그 와중에 시대를 망각한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까지 터져 나왔다. 국민 앞에 당당하겠다던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탄핵 심판과 관련한 서류 제출을 미루고 출석까지 거부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체포 영장이 청구됐다. 이재명 대표는 우편 송달을 거부하다 변호인 선임까지 미루는 중이다. 야당 대표가 국선 변호인을 쓸 판이다. 권위를 잃은 사법 시스템을 조롱하듯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민사 잡범들이나 할 짓을 태연히 국민 앞에서 벌이고 있다.

이처럼 재판 지연 전략은 일종의 법조 트렌드가 됐다. 판결이 불리하다 싶으면 헌법소원에다 위헌 심판청구부터 제기하고 본다. 헌법재판소에 ‘던지면’ 진행 중인 재판 일정이 줄줄이 밀린다는 걸 다들 안다는 이야기다. 대법원 확정 선고로 교육감직을 상실한 하윤수 전 부산시교육감도 1심에서 당선무효형이 선고되자 헌법소원을 꺼내 들고 임기를 반 가까이 채웠다. 기약 없던 교육감 재판 일정은 2년 간의 정통성 잃은 교육청 행정과 뒤늦은 재선거로 이어졌다. 법 위반이야 당사자의 잘못이지만 그로 인한 교육 서비스의 파행에서 법원도 그 책임을 피해 갈 수 없다.

지난 주말 부산 시내에서는 국회의원 사무실을 점거하고 내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무력시위까지 벌어졌다. 비상계엄의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시민이 아닌 사법부다. 이런 사적제재의 기저에 깔린 심리는 두 가지다. 법원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 혹은 법원 대신 내가 단죄하겠다는 만용. 그 어느 곳에도 사법부에 대한 존경은 없다.

신문을 펼치면 정치면 기사의 반 이상이 재판 소식이다. 민심이 여기까지 싸늘해졌다면 사법부도 ‘지연된 정의’란 저잣거리 비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경기가 끝나고 텅 빈 경기장에서 제아무리 근엄하게 휘슬을 불어본들 심판에게 존경심을 표할 관중은 없다. 그리고 뒤늦게 울린 휘슬로 뒤틀린 경기 결과는 열정을 바친 선수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준엄한 심판의 귀환을 기다린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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